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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문연 시인 / 시비(詩碑)
안면도 바닷가 솔숲 시비(詩碑)* 하나 비릿한 갯냄새가 비석을 감돌고 솔가지 사이를 비집고 내려온 낮달이 한가롭게 시비를 읽고 있다
몇 줄로 요약된 시인의 생애 밧줄을 잡고 바다를 건너던 시인이 마지막 호주머니에 남겨둔 150원, 돌아오려고 남겨둔 뱃삯이었을까
내 호주머니에 얼마를 넣어야 저 긴 물길을 잡을 것인가, 저 세찬 불길을 잡을 것인가
파도소리 한상 차려놓고 시인은 아직도 시를 쓰고 있다
*채광석의 시비
곽문연 시인 / 눈길
밤새 내린 눈이 발목까지 차오른다 잠을 덜 깬 눈바람에 옷깃을 여미는 산책길 한걸음 앞선 작은 들새들의 날갯짓에 숲에 매달린 축복이 흩날린다
풍경에 취해 걷다 문득, 뒤돌아보면 지그재그 뒤따라온 발자국들 순백의 숲, 백지에 발로 쓴 글씨들 드러난 상처가 깊다
산허리에 쌓인 눈이 가로막아 되짚어 내려오는 길, 이런 날은 산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
단단한 묵상 앞에 눈밭에 기록한 글씨는 지워지고 들새들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계간 『시에』 2013년 봄호
곽문연 시인 / 쥐
저녁 TV뉴스 사람과 쥐의 유전자지도를 따라가 보았더니 팔할이 한자리에서 만나더라는 것이다
툭하면 쥐새끼만도 못한 놈들! 쥐새끼 같은 놈들!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시던 중학교 시절 역사 선생님이 생각난다
지금 어디쯤 살아 계셔 저 뉴스 들으신다면 옳거니! 파안대소하지 않으실까
쥐새끼가 쥐새끼 아니라고 찍찍거려본들 이할 밖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쥐새끼들이 TV에서, 거리에서 우글거린다
쥐새끼와 다른 이할을 우쭐대는 사람들 사람과 쥐를 한 저울에 올릴 수 있느냐며 내 뺨때기를 한번 후려칠 터이지만
지금 새앙쥐 한 마리가 창 밖을 보며 쥐꼬리만한 상상력으로 시를 쓰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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