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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시인 / 곶감을 깎는 일
햇볕 잘 익은 마루에 모여 여인들이 처마에 매달아 둘 감을 깎는다 좀처럼 떫은맛을 버릴 줄 모르는 단단한 기억들을 가지고 나와 사르륵 깎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칼날을 빠져나온 껍질은 어느새 기억을 더듬는 뒷길 되어 몸을 뒤튼다
가끔 빈 소리로 농담이 오고 갈 뿐 누구도 자신의 길에 눈을 떼지 않는다 메말랐다고 생각했던 눈물샘이 다시 터질 것 같은 자그마한 떨림이 그들의 가슴을 지나갔기 때문이리라
손마디 까맣게 물들고 저녁이 와서 깎은 감을 실에 꿰어 일어날 때 그들의 손에 들려질 것은 더 이상 떫은 감이 아닐 것이다, 처마 밑은 한 사람씩 준비한 연등으로 환해지리라
가을 햇살 숨어들어 검붉게 불을 밝히는, 스스로의 눈물로 밝아지는 등 여인들은 어두웠던 기억을 밝히기 위해 저마다의 연등을 깎고 있는 것이다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문학세계사, 2004)
길상호 시인 / 상처가 부르는 사람
도마 위에 쓰다 남은 양파 조각들 아침에 보니 그 잘린 단면에 날벌레들이 까맣게 앉아 있다, 거기 모여 있는 벌레들은 식물의 먼 길 바래다 줄 저승사자, 검은 날개의 옷을 접고 앉은 그들에게 칼자국이 만든 마지막 육즙을 대접하며 양파는 눈을 감는다 가슴에 차오르는 기억을 날개마다 가만히 올려놓는 중이다 매웠던 삶이 점점 사그라지면서 양파는 팽팽했던 긴장감에서 벗어난다 벗기려고 애써도 또다시 갇히고 말던 굴레를 이제 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보니 나에게도 상처가 불러들인 사람 있었다 그때 왜 나는 붉은 핏방울의 기억을 숨기려고만 했던 것일까 힘들게 온 그에게 술 한 잔 대접하지 못하고 혼자 방문 닫고 있던 것일까, 그래서 나는 지금 더욱 난감하게 갇히고 마는 것이다 속으로 혼자 썩어 가고 있는 중이다
《문학마당》2003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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