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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기택 시인 /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5.

김기택 시인 /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그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 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김기택 시인 / 머리카락 하나

 

 

난로 위에 머리카락 하나가 떨어진다

머리카락은 타면서 액체가 된다

액체는 거품을 물고 격렬하게 꿈틀거린다

그 꿈틀거림 속에서 고약한 냄새가 뿜어져 나온다

뿌리를 뻗으며 식물인 양 얌전하게만 자라던 것이

불에 닿자마자 슬픈 몸짓 역한 냄새로

제 뜨거운 동물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니,

눈 달린 것 이빨 달린 것 숨쉬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독한 냄새를 지우려고 창문을 열자

차고 커다란 겨울바람이 들이닥친다

머리카락 속에서 용쓰던 힘과 냄새는

그 바람 속으로 고분고분하게 빨려들어간다

하나씩 죽음이 보태질 때마다

바람에도 조금씩 힘이 더 붙는다

그 바람이 낡은 집을 붙들고 요란하게 흔들어대니

문짝들 창문들은 덜컹거리고 삐꺽거리며 밤새 앓는 소리다

난로 위에는 이제 더이상 머리카락이 아닌 것이

상처자국처럼 꺼멓게 눌어붙어 있다

 

 


 

 

김기택 시인 / 전자레인지

 

 

불도 없는데

생선비늘 들썩거린다

이글이글, 입에서 거품이 나온다

퍽, 퍽, 몸 안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 들린다

은비늘 하나 다치지 않은, 바다에서 막 나온 것 같은 생선,

김과 열을 뿜는 흰 접시가 전자레인지에서 나온다

 

불도 없는데

할머니 얼굴 쭈글쭈글해진다

등뼈가 휘어지고 오그라들고 굳어진다

거친 숨, 가는 신음이 몸 안에서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깊은 주름을 흔들며 이 빠진 아이처럼 깔깔거리는 할머니

성한데 없는 맑고 어린 웃음이 경로당에서 나온다

 

현대시 (2004년 9월호)

 

 


 

김기택 시인

1957년 경기도 안양에서 출생. 중앙대 영문과 졸업. 경희대학교대학원 국문과 박사.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가뭄>〈꼽추〉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태아의 잠』(문학과지성사, 1991) ,『바늘구멍 속의 폭풍』(문학과지성사, 1994), 『사무원』(문학과지성사, 999) ,『소』(문학과지성사, 2005), 『껌』(문학과지성사, 2009) 등이 있음. 김수영문학상(1995)과 현대문학상(2001), 이수문학상(2004), 미당문학상(2004) 수상. 제6회 지훈문학상(2006). 상화시인상(2009).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