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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시인 /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그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 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김기택 시인 / 머리카락 하나
난로 위에 머리카락 하나가 떨어진다 머리카락은 타면서 액체가 된다 액체는 거품을 물고 격렬하게 꿈틀거린다 그 꿈틀거림 속에서 고약한 냄새가 뿜어져 나온다 뿌리를 뻗으며 식물인 양 얌전하게만 자라던 것이 불에 닿자마자 슬픈 몸짓 역한 냄새로 제 뜨거운 동물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니, 눈 달린 것 이빨 달린 것 숨쉬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독한 냄새를 지우려고 창문을 열자 차고 커다란 겨울바람이 들이닥친다 머리카락 속에서 용쓰던 힘과 냄새는 그 바람 속으로 고분고분하게 빨려들어간다 하나씩 죽음이 보태질 때마다 바람에도 조금씩 힘이 더 붙는다 그 바람이 낡은 집을 붙들고 요란하게 흔들어대니 문짝들 창문들은 덜컹거리고 삐꺽거리며 밤새 앓는 소리다 난로 위에는 이제 더이상 머리카락이 아닌 것이 상처자국처럼 꺼멓게 눌어붙어 있다
김기택 시인 / 전자레인지
불도 없는데 생선비늘 들썩거린다 이글이글, 입에서 거품이 나온다 퍽, 퍽, 몸 안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 들린다 은비늘 하나 다치지 않은, 바다에서 막 나온 것 같은 생선, 김과 열을 뿜는 흰 접시가 전자레인지에서 나온다
불도 없는데 할머니 얼굴 쭈글쭈글해진다 등뼈가 휘어지고 오그라들고 굳어진다 거친 숨, 가는 신음이 몸 안에서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깊은 주름을 흔들며 이 빠진 아이처럼 깔깔거리는 할머니 성한데 없는 맑고 어린 웃음이 경로당에서 나온다
현대시 (200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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