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태 시인 / 벽오동의 밤
금개구리 숨소리에 오동잎이 흔들린다 네 몸 썰물같은 기억 지울라치면 벽오동에 가 젖은 달빛을 피해보라 상처 벌린 몸이 간혹 시려지거든 벽오동 아래서 밤비를 그어 보라 명낭鳴囊 도 없이 공명하는 마음있다면 벽오동 숲속은 어둡고 누긋할 것이다 야윈 빗줄기에도 벽오동은 길게 운다 제 몸 스스로 비옷 되었기 때문이리라
시집 - 떠나온 것들의 밤길 ( 2004년 시와시학사)
김종태 시인 / 마른 장마
얼마나 많은 속옷을 갈아입어야 너 사는 사막에 닿을 수 있을까
세탁기처럼 제자리 돌아야 한다는 것은 홀로 젖는 일일 뿐이다
베란다로 넘어오는 어둠은 오랜 마음의 삼투를 이기지 못하고
몸 안의 시간들을 버릴수록 뿌옇게 되살아오는 기억의 물거품
한번 흘러간 것들은 천둥으로도 번갯불로도 돌아오지 않는다
바로 곧 열대야가 오겠지만 나는 작은 소리에도 고막이 터진다
시집- 떠나온 것들의 밤길 (2004. 시와 시학사)
김종태 시인 / 미아리
우산 쓰고 미아리를 건너갈 때 초로의 남자가 담뱃불을 빌리러 왔다 신문뭉치로 숱 성긴 머리를 가린 채 그가 문 담배는 반쯤 젖어 고갯길 전봇대는 인가 쪽으로 휘어 있었다 아리랑 고개 어디쯤에서 발 동동 구르고 있을 내 여자를 생각할 뿐이었다 갈 길은 우회로뿐이어서 장마의 바람은 제 짝을 잃어도 외로워하지 않았고 불을 만들지 못하는 불꽃 앞에 서서 '지리산 처녀 보살' 간판을 가린 조등을 보았다 불현듯 조객처럼 서러워졌다 어떤 전생이 비 새는 파라솔의 백열등처럼 서서 그와 나의 무의미한 상관성을 내리 비추고 있는 것일까 객들의 사연을 살피던 처녀보살은 자신의 내력을 펼친 채 그 위에 누웠다 라이터가 반짝하고 꺼지는 사이 그는 엄지에 힘을 주며 끌고 온 등 뒤의 내력을 곁눈질했다 나는 젖고있을 여자 생각뿐이었다 죽음 이후 익명의 흔적을 지우고 가는 사이렌소리가 천천히 밤고개를 넘어갔다 아직도 노인은 라이터를 켜고 있었다
시집- 떠나온 것들의 밤길 (2004. 시와 시학사)
김종태 시인 / 하현달
사라지는 것들이 있는 것을 아름답게 한다 제 몸 지우는 달빛 아래 양을 파는 포장마차들 황학동, 적막한 잔치의 막을 내려야 아침은 오는가 늙은 가로수가 해 뜨는 쪽으로 이파리를 떨어 뜨릴 무렵 쓰레기차가 마지막 손님인 양 다녀 갈 것이다 곱창을 빌리러 온 할머니의 다리가 활처럼 굽었으나 그에게도 단단한 석회질의 기억은 있다 마음을 닫은 밤하늘이 한없이 열리는 날 나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사람일지 모른다 사라진다는 것은 살아서 닿지 못한 길과의 만남이다 한 테이블의 손님이 일어설 줄 모르므로 젊은 여주인은 달 위에 올라앉아 미끄럼을 탄다 금빛 귀고리를 돌며 별빛은 사위어 가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있는 것을 아름답게 한다
*마지막행은 보들레르 산문 <화장예찬>의 한 구절
시집- 떠나온 것들의 밤길 (시와 시학사. 2004년)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류인서 시인 / 물. 꽃 외 1편 (0) | 2022.02.15 |
|---|---|
| 나태주 시인 / 노(櫓) 외 1편 (0) | 2022.02.15 |
| 김기택 시인 /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외 2편 (0) | 2022.02.15 |
| 길상호 시인 / 곶감을 깎는 일 외 1편 (0) | 2022.02.15 |
| 구순희 시인 / 나쁜 멸치 외 1편 (0) | 2022.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