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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희 시인 / 나쁜 멸치
막차 놓칠까봐 혜화역 계단 급히 내려가는데 느긋하게 지상으로 올라오는 한 여자 휴대폰에다 대고 연신 멸치 멸치 나쁜 멸치 내 뒤로 저무는 바다를 끌고 온 삼천포 아가씨도 그 말 듣고 눈이 동그레진다 애인이 멸치인가봐 그녀는 남편이 멸치일 거라는데 비쩍 말랐는지 통통한지 모를 나쁜 멸치 뼈째 씹어먹어도 분 풀리지 않을 기세로 애인인지 남편인지 매섭게 통화하던 여자도 멀어지고 통째로 먹히기도 , 부분만 취해지기도 하는 세상 뜨거운 국물에 골수 다 빼주고도 버려지는 산재한 멸치 멸치 나쁜 멸치 중얼거리다가 막차 놓칠 뻔한 날.
구순희 시인 / 지금 꽃이
일요일 아침, 아직 곤한 잠에 빠져 있는데 안내 방송이 고막을 찢는다 귓결에 장미꽃이, 수십 개의 가시가 떨어져
지금…꽃이…시들고…있으니…꽃…좀…찾아가세요 시아버님이…며느님…생일이라고…꽃을…보냈는데요 어제…꽃을…보냈는데요…꽃을…찾아가지…않아서 꽃이…다…시들고…있으니……다시 말씀드립니다
지금…꽃이, 시들고 있으니, 내가 시들고 있으니 숨어 있던 가시 같은 말이, 눈길이 정신 번쩍 나는 늦잠이 더듬거리고 있으니
시어머니 몰래 며느리한테 꽃 선물한 한 시아버지가 시들고 있으니 문이 잠겨 꽃바구니도 전달하지 못하고 경비실에 맡기고 산 한 시아버지가 시들고 있으니 꽃 선물도 못하는, 돈도 없는, 며느리도 없는 여러 시아버지가 시들고 있으니 시아버지도 없는 며느리가 시들고 있으니 남편한테도 꽃 한 송이 받아 보지 못한 이 지상의 한 여자가 시들고 있으니 지금 꽃이 시들고 있으니……
<시안> 1999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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