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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서울대교구장 임명] 공학도 꿈꾸다 부르심에 응답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16.

[서울대교구장 임명]

공학도 꿈꾸다 부르심에 응답… 따뜻함 가득한 참 목자

정순택 대주교 삶과 신앙

가톨릭평화신문 2021.11.07 발행 [1636호]

 

 

정순택 대주교는 학창 시절 친구들과 초를 만들어 팔아 보육원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해주고, 장학금을 형편이 어려운 친구에게 양보했다. 조용하고 따뜻한 성품에 축구를 좋아했으며, 어머니가 암 투병을 할 땐 누나, 여동생과 함께 병상에서 기타를 치며 성가를 불러드렸다.

 

깊은 신앙과 겸손, 화합과 경청을 중요시하는 삶의 태도, 따뜻하고 배려하는 성품…. 27년 7개월 동안 수도자로 살아온 정 대주교에게 ‘온유ㆍ겸손ㆍ친절’을 빼놓고는 그의 인품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가르멜 영성이 몸에 밴 주교로서 한국의 청소년들과 수도자들의 따뜻한 사목자로 동반해왔다.

 

이지혜 기자 bonappetit@cpbc.co.kr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정순택 대주교에게 신앙 유산을 물려준 이들은 부모였다. 영남대 법대 교수를 지낸 아버지(정운장 요셉, 1929∼2000)와 어머니(조정자 데레사, 1937∼2000)씨는 삼남매에게 항상 하느님을 첫 자리에 두는 모습을 보여줬다. 부모가 큰 소리로 싸운 기억이 없을 정도로 부부 사이는 각별했고, 부부간 사랑은 자녀들에게 신앙의 씨앗이 되어줬다. 정 대주교의 부모는 포콜라레 운동의 성소 중 하나인 솔선자로 활동했으며,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묵주 기도를 바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삼남매는 고3 시절을 보내는 동안에도 주일 미사를 거른 적이 없었다.

 

정 대주교의 두 살 터울인 누나 정혜경(헬레나)씨는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 꾸중을 듣거나 혼난 적이 없고, 저와 다툰 일이 한 번도 기억나지 않는다”면서 “늘 주변에 친구가 많았고, 축구를 좋아했던 동생”이라고 회고했다. 정씨는 “부모님이 서로 얼굴을 찡그리거나 누구 하나 무거운 분위기를 낸 적이 없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순간에도 부모님은 물질 너머에 귀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셨다”며 “부모님의 삶은 알게 모르게 정 대주교님에게 스며들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털어놨다.

 

 

정 대주교는 1961년에 태어나 그 해에 대구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대구 효성초교와 서울 동일중, 우신고를 다니며 거의 전 과목 만점을 받아 ‘수재’로 통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정 대주교는 친구들과 ‘한바우’(하나의 바위를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인천 영종도의 보육원에 찾아가 아이들과 종종 놀아줬다. 크리스마스 때에는 보육원 아이들에게 성탄 선물을 해주고 싶어 집에서 파라핀을 녹여 직접 초를 만들어 팔곤 했다. 친구들과 초를 판 돈을 모아, 과자랑 선물을 사서 보육원 아이들에게 안겨줬다.

 

정 대주교는 1980년 서울대 공대 공업화학과에 입학했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학자의 길을 향했지만 공대 재학 중이었던 3학년 여름방학, 삶의 계획이 송두리째 바뀐 계기를 맞았다. 대구에서 열린 포콜라레의 ‘마리아 폴리(나이와 신분, 직업과 상관없이 모여 사랑을 실천하는 마을)’에서 신앙 체험을 했다. 한 부제가 털어놓은 성소 체험담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부르시고 쓰신다’는 것을 깨달은 정 대주교는 대학을 졸업한 후 가톨릭대 신학대 2학년에 편입했다.

 

신학교 편입 당시 서울 둔촌동본당 주임 신부로 추천서를 써준 임상무(교구 원로사목자) 신부는 “주일학교 교사로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성당에 일이 있을 때마다 신학생들이랑 빠지지 않고 봉사했다”면서 “한결같이 착하고 성실했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회고했다. 정 대주교는 신학교에서 한 학기를 마친 후 입대할 예정이었지만 허리를 다쳤고, 요양하는 동안 가르멜 영성 서적을 읽게 됐다. 가르멜 영성에 푹 빠진 정 대주교는 1984년 12월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서를 낸 후 보충역으로 입대해 병역 의무를 수행한 후 1986년 5월 수도회로 돌아왔다. 1988년 2월 첫 서원을 한 정 대주교는 1992년 7월 16일 가르멜 수도회 인천수도원에서 사제품을 받고 온전한 수도 사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사제품을 받은 후, 가르멜 수도회 수련장을 시작으로 서울 학생수도원 원장, 광주 학생수도원 원장 등을 지내며 오랜 시간 수도자 양성에 힘썼다. 모든 것을 ‘신앙의 눈’으로 보기 위해 노력했고, 공동체 형제들에게 형제적 사랑을 쏟아 부었으며, 늘 남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심으로 형제 수사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사제 수품 동기인 양상륭(가르멜 수도회) 신부는 “밤늦게까지 같이 공부하다가 대주교님께서 제 피곤함을 달래주시고자 그때까지만 해도 수도회 내에선 금지 품목이었던 커피를 타러 가셨는데, 그만 원장님께 들켜 크게 혼나 사색이 되셨던 기억도 있고, 주일에 제 머리를 깎아주셨는데 머리를 망칠까 봐 무려 3시간이나 심혈(?)을 기울이던 모습이 떠오른다”며 “그렇게 배려심과 피해를 주지 않으시려는 마음이 남다르게 크신 분”이라고 전했다.

 

온유함과 따뜻함, 그의 봉사적 리더십은 2009년 가르멜 수도회 로마 총본부의 최고평의원(부총장)에 임명되면서 빛을 발했다. 동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지역의 선교 담당 부총장으로 활동하면서 지역 가르멜 수도회의 일치와 협력에 그의 열정을 쏟았다.

 

 

 

 

 

정 대주교는 2013년 12월 30일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된다. 한국 교회 첫 가르멜 수도회 출신 주교가 된 그는 “(주교 임명 서류를 받고) 하도 뜻밖이어서 며칠 동안 제대로 잠도 못 이뤘다”면서 “하느님께서 지난날의 묵은 저를 비워내고 새롭게 출발시키신다는 느낌이 들어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신 성모님 말씀대로 (주교직을) 받아들였다”고 털어놨다.

 

정 대주교는 주교로 임명된 당시 ‘하느님 아버지, 어머니 교회’(Deus Pater, Mater Ecclesia)를 사목표어로 정했다. 문장을 통해 자애로운 어머니이신 성교회의 품이 모든 이를 감싸 안는 따뜻한 어머니의 품이요, 그 안에서 모든 이가 하느님 아버지 사랑을 충만히 받고 체험해 나가는 교회임을 고백했다.

 

 

 

그는 청소년 및 수도회 담당 교구장 대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를 역임하며 주교로서 행보를 시작했다. 경청을 바탕으로 한 소통의 달인으로 젊은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기존의 주일학교와 청년회라는 전통적인 사목 구조 안에는 청소년들의 현실을 모두 담는데 한계가 있음을 직시하고, “청소년들이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는 다양하고 포괄적인 시도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해왔다.

 

특별히 청년들과 함께하려는 모습은 젊은이들의 마음도 따뜻하게 만들었다. 2016년 폴란드 세계 청년대회에 청년들과 함께 참여한 정 대주교는 2주에 걸친 대회 기간 내내 그야말로 ‘청년의 모습’이었다. 청년들처럼 노란색 대회 가방을 메고 모든 프로그램에 동참했으며, 식사 때마다 청년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스스럼없이 함께하는 것을 좋아했다. 대회 기간 중 있었던 주교단 만찬에 주교복을 입고 나타난 다른 주교들과 달리, 주케토(주교 모자) 없이 평범한 사제 복장으로 나타나 이목을 끌었던 일화도 당시 참가 청년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정 대주교는 대회 마지막 일정인 교황 주례 폐막 미사에 전날 드넓은 야외 광장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며 청년들 속에서 비박도 함께하는 주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