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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길원 시인 / 늙은 대추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6.

이길원 시인 / 늙은 대추

 

 

떫고 아리던 풋대추

비바람 태풍에 시달리다

한여름 태양에 붉게 몸 태우고

가을 서릿발에 오그라들며 알았네

삶의 절정이 지금이라는 것을

 

산등성이에 올라 세상사 굽어보듯

돌아보는 삶

밥알 넣어주기 바쁘던 품속의 아이들 떠나고

욕망 삼키고 야심 잠재운 늦가을

흐르는 구름처럼 평안하기만 한데

언제 지금처럼 평온한 날 있었나

 

이제야 알았네

쪼글쪼글 붉은 대추 속살

달콤한 연유를

나이 칠십에.

 

 


 

 

이길원 시인 / 독도

 

 

순국선열이다

고독이 성난 파도 되어 가슴을 치고

뼛속 깊이 스미는 그리움 시린 바람에 시달려도

동해 가르는 첫 햇살 심장에 담아

온 누리 비추는 사랑하는 마음 하나

누가 외롭다 했나

오래 산 부부처럼 마주 앉은 섬 두 개

겨드랑이엔 알 품은 바다제비 괭이갈매기

만세 부르듯 떼지어 소리치고

때마다 가슴엔 꽃이 피고

나비 날아드는데.

 

 


 

 

이길원 시인 / 달팽이

 

 

젖은 아침

간 밤 장마에 부러진 갈대

비스듬 잡은 달팽이 한 마리

촉수 휘두르며 간다

 

천천히

 

한 걸음에 갈 수 있는 길이 어디 있으랴

울퉁불퉁한 길

간다

 

비 갠 하늘

여름 해 달아 오는데

멀고 먼 갈대 끝 길.

 

 


 

 

이길원 시인 / 북한산 소나무

 

 

언제부터 그 곳에 있었을까

바위투성이

살 붙일 곳도 없는 아슬한 등산길에

소나무

갓 푸른 스무 살 처녀처럼 반들반들한 허리

오가는 사람 그 허리 잡고 험한 길 넘는다

 

부처님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 그 허리 잡고

아슬한 길 넘었을까

나도 지주 삼아 빙그르 돌며 바윗길 넘는다

그보다 먼저 태어난 중생

누구에게 허리 내밀어 지주가 된 적이 있었던가

 

소나무만도 못한 짐승

손 모아 합장이나 해 본다.

 

 


 

이길원 시인

1944년 충북 청주 출생. 연세대학교 졸업. 1980년 『시문학』 등단. 시집 『꽃을 심는 손』 『해이리시편』 『어느 아침나무가 되어』 『계란 껍질에 앉아서』 『은행 몇 알에 대한 명상』 『하회탈 자화상』저서 『시 쓰기와 실제와 이론』대한민국문화예술상, 서울시문화상, 윤동주문학상, 천상병문학상 등 수상. 국제PEN한국본부 이사장, 『문학과창작』주간, 『미네르바』편집고문 역임. 현재 국제PEN이사. 망명북한PEN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