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원 시인 / 늙은 대추
떫고 아리던 풋대추 비바람 태풍에 시달리다 한여름 태양에 붉게 몸 태우고 가을 서릿발에 오그라들며 알았네 삶의 절정이 지금이라는 것을
산등성이에 올라 세상사 굽어보듯 돌아보는 삶 밥알 넣어주기 바쁘던 품속의 아이들 떠나고 욕망 삼키고 야심 잠재운 늦가을 흐르는 구름처럼 평안하기만 한데 언제 지금처럼 평온한 날 있었나
이제야 알았네 쪼글쪼글 붉은 대추 속살 달콤한 연유를 나이 칠십에.
이길원 시인 / 독도
순국선열이다 고독이 성난 파도 되어 가슴을 치고 뼛속 깊이 스미는 그리움 시린 바람에 시달려도 동해 가르는 첫 햇살 심장에 담아 온 누리 비추는 사랑하는 마음 하나 누가 외롭다 했나 오래 산 부부처럼 마주 앉은 섬 두 개 겨드랑이엔 알 품은 바다제비 괭이갈매기 만세 부르듯 떼지어 소리치고 때마다 가슴엔 꽃이 피고 나비 날아드는데.
이길원 시인 / 달팽이
젖은 아침 간 밤 장마에 부러진 갈대 비스듬 잡은 달팽이 한 마리 촉수 휘두르며 간다
천천히
한 걸음에 갈 수 있는 길이 어디 있으랴 울퉁불퉁한 길 간다
비 갠 하늘 여름 해 달아 오는데 멀고 먼 갈대 끝 길.
이길원 시인 / 북한산 소나무
언제부터 그 곳에 있었을까 바위투성이 살 붙일 곳도 없는 아슬한 등산길에 소나무 갓 푸른 스무 살 처녀처럼 반들반들한 허리 오가는 사람 그 허리 잡고 험한 길 넘는다
부처님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 그 허리 잡고 아슬한 길 넘었을까 나도 지주 삼아 빙그르 돌며 바윗길 넘는다 그보다 먼저 태어난 중생 누구에게 허리 내밀어 지주가 된 적이 있었던가
소나무만도 못한 짐승 손 모아 합장이나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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