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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경희 시인 / 조개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6.

박경희 시인 / 조개

 

조개에도 나이테가 있다

파도를 품고 갯벌을 파고드는 힘으로

조개는

나이를 먹는다

손끝으로 건드리면

이내 몸을 닫아버리는, 쏜살같은

조개가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 것은

흩어져 버릴 파도가 있기 때문이다

바다 끝으로 사라지는 통통배처럼

멀어졌다 다시 가까워지는

푸른 섬처럼

주둥이 꽉 다물고 오지게

나이만 먹고 있는

보드라운

여자, 조개

 

 


 

 

박경희 시인 / 별빛을 우러러 보고 있었다

 

 

시골집에는 변소가 두 개 있었다

 

백년 묵은 상수리나무 옆 언덕바지까지 늘어진 지붕이 을씨년스레 웃고, 철모처럼 똥바가지 뒤집어 쓴 수국이 토악질해대던 변소

 

대문 옆 마른 볏짚으로 지붕을 얹고, 똥통 가까이 피어있던 수수꽃다리 깜박거리는 별빛에 눈길 한 번씩 던지던 변소

 

할아버지 똥줄을 잡고 오르던 상수리나무 뿌리들이 일어선다 고집으로 똘똘 뭉친 상수리가 열리고 똥장군지게 끝에서 메꽃이 잎을 오므리는 순간, 참새들을 보듬고 있던 대나무가 앞으로 눕는다 소쩍새 울어대는 언덕바지에 별이 떨어진다

식솔들은 그곳에서 일을 보지 않았다

 

수수꽃다리 향기 코끝 간질하게 재채기 나오던 변소에서 바지춤을 여미곤 했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후 상수리나무 옆 변소는 사라지고 상수리나무도 베어졌다 굵은 밑동은 나이테를 올리며 덩그러니 별빛을 우러러 보고 있었다

 

한밤에 울어대던 솔부엉이 종종 날아들어 어깨를 움츠리게 했었다

 

 


 

 

박경희 시인 / 색(色)

 

 

살 냄새가 난다, 고

두륜산을 오르던 애인이

내 목덜미에 코를 댄다

순간, 바위에 앉아 숨고르던

바람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동백꽃을 건드린다

내 몸이 놀라 저 멀리 달아난다

애인은 허공을 쥔

내 손을 붙잡고

오르는 내내

살 냄새가 나, 살 냄새가 나

떨어지는 햇살처럼

가슴 아래서 부서졌다

 

젖꼭지가 맹감처럼

빨개

 

 


 

 

박경희 시인 / 그곳에 가 보면

 

 

안녕리에 가 보면 맥없이 솟아 있는 기둥이 여러 개

모두 일별을 한 것이다

만남도 헤어짐도 안녕리에서는

뽀얗게 먼지 뒤집어쓰고

쓸쓸히 엉덩이를 기다리는 툇마루인 것이다

 

무거운 발걸음 속 달라붙는 그림자

깨진 기왓장이 끌어안고 있는 빛 잃은 알전구와

덩그러니 빈집 마당을 지키는

구멍 환한 항아리

버석거리는 나무기둥이 나이테를 놓는 곳이다 때론,

 

뭉턱뭉턱 사선으로 잘려나간 대나무 끝에

가슴을 다치기도 한다

내 마음 한 자리 빗금으로 내려앉아 우는 아우

대숲이 일렁이는 곳에서 바람 부는 쪽으로

내 마음 기우는 것도

짧은 대나무 마디처럼 살다간 아우의 빈곳이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에 가 보면 처마 끝

밑구멍 환한 목어 여러 마리가

바람 가는 쪽으로 몸통을 두드리고 있다

뽀얗게 먼지 뒤집어 쓰고

쓸쓸히 엉덩이를 기다리는 툇마루가 있다

 

 


 

박경희 시인

1974년 충남 보령에서 출생.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1년 《시안》 신인상 수상. 시집으로 『벚꽃 문신』, 산문집 『꽃 피는 것들은 죄다 년이여』 『쌀 씻어서 밥 짓거라 했더니』, 동시집 『도둑괭이 앞발권법』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