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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리영 시인 / 단풍나무 눈물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1.

김리영 시인 / 단풍나무 눈물

 

 

낙엽 밟고 걷는 연인들,

소풍 가방 들고 아빠를 따라 나온 아이들,

그들의 머리 위로 뚝뚝 잎 떨구며

벌레 먹은 잎까지

타들어가는 절정을 겪고 있는

단풍.

 

내가 삶의 절정을 두려워하였음을 깨닫고 난 뒤부터

단풍 드는 나무의 모습은 눈물겹다.

 

생의 한 껍데기 태우고 난 뒤

한 악장 끝내고 난 뒤의 공허처럼

겨울이 올지라도,

온몸 태워 새 봄 새 순 밀어 올릴 나무들은

지금 뜨거운 불길 피하지 않고 있다.

정면으로 타오르고 있다.

 

 


 

 

김리영 시인 / 피어나지 마, 꽃잎

 

 

네가 보는 세상은

조그맣고 아름다운 정원

하늘거리는 너의 향기에

벌들 바삐 날아드는 세상만은 아니란다

 

사람들은 돈을 세고

마음과 마음은 닿지 않고

해는 지고 별이 떠도

노을의 냄새, 파도의 이름

사람들은 상관 안하지

 

피어나지 마

이 더럽고 우스운 세상에

네가 떨어질 땅은 없어

 

어느 날 네가 깊은 꽃순 다쳐

거리의 어둔 공원에 목이 꺾어진 채

사람 하나 믿어보고 싶어도

떨어질 땅은 너무 멀고,

너는 아무런 힘이 없어

 

피어나지 마

너의 여린 꽃잎 쉬어갈 곳은 없어

차라리 가장 아름다운 햇빛 속

감추듯 씨앗을 심어

 

어딘가 떨어지고 싶다면

사람들이 없는 평화로운 곳으로 가서

마음을 놓고 지는 거야

어딘가 묻히고 싶다면!

 

 


 

 

김리영 시인 / 천왕성

 

 

오늘 밤 무심코 올려다본

아버지의 별에서 빛이 새고 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던 아버지의 그림자,

다가가 채워드리지 못한

겨울 외투 단춧구멍으로 빛이 샙니다.

 

외갓집 뒷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새파란 이끼 따 모아 소꿉놀이하던 시절

궤도가 조금씩 불규칙한 행성에 대해

그 땐 이해할 줄 몰랐습니다

 

망원경으로 찾은 떠돌이별 하나

따사로이 사랑할 줄도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왜 한 번도 저를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께서 보낸 노새가

곡식자루와 마분지, 필통을 등에 싣고

방울소리 울리며 제 집 앞을 지나갑니다.

 

아무런 신념도 없이

저를 이 세상에 남긴 것은 어니었다고

무어라 변명이라도 해주시지요.

제 목소리 자꾸만 빗나가도

바람에 묻힌 아버지의 이름을

마음껏 아버지라 부르게 놔두세요.

 

 


 

김리영(金梨英) 시인

서울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세종대학교 무용과 졸업. Southern Oregon University에서 Art 수학. 1991년 4월 《현대문학》에 〈죽은 개의 슬픔〉외 5편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서기 1054년에 폭발한 그』(현대시, 1993) , 『바람은 혼자 가네』(동학사, 1999), 『푸른 콩 한 줌』(문학아카데미, 2006)등과 『구름에 기대지 않는 춤』(바움커뮤니케이션, 2011 P&A시집)이 있음. 2012 제4회 바움문학작품상 수상. 2013차세대안무가클래스 대본, 출연. 2013 홍콩국제연극제 대본,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