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세라 시인 / Full Moon
한쪽 눈을 감을 때 다른 쪽 눈에 씌는 보색의 착란처럼 그가 온다 대지의 땀구멍마다 식은땀으로 돋아 오른 비닐을 밟으며
로라는 라텍스 장갑을 낀 손으로 그의 안구를 조심스레 돌려 뺀다 홍채 인식 개찰구는 시간여행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장치지만
검은 동공의 외곽을 따라 은초록 빗선들이 무성한 무늬로 권해본다 그가 끄덕이고 로라는 빼낸 안구에 새 무늬의 홍채를 부착한다 땜질을 마치고 힘주어 원래 자리에 조립한다 잠시 스칠 때 묻었던 그의 지문을 닦아낸다
이번엔 통과할 수 있을까?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물을 때 이봐요, 마테, 어디에나 가볍고 질기고 부풀어 오르는 게 있어 로라는 곧 터질 비닐의 웃음으로 응답한다 늘 있는 일이야 실패에 대해 그가 말할 때 사실 실패는 백 년쯤 썩지 않지 땅속 깊이 파묻어도 로라는 그와의 대화를 재빨리 코팅한다
다시 그가 말한다 나는 잃었지만 가족들은 버림받았다 생각하겠지 늘 있는 일이야
로라가 작업대를 치우고 돈을 받고 마테를 보낸다 구석에 웅크린 여자아이를 향해 눈을 찡긋해 보인다
당신이 착용하려던 무늬였잖아요 그에게 더 필요한 것 같아 내 것과 같은 무늬였잖아요 너와 함께 걸어도 혼자 가는 것처럼 느껴져 혼자 걸어도 동행 같을 때가 있었잖아요
선반에 늘어선 인조 안구들이 형광빛을 내기 시작한다 흰 비닐의 달이 창틀에 엉덩이를 댄 채 움직이지 않는다 불면의 밤이 그대로 얼어붙는다
계간 『시와 세계』 2021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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