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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세라 시인 / Full Moon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1.

최세라 시인 / Full Moon

 

 

한쪽 눈을 감을 때 다른 쪽 눈에 씌는 보색의 착란처럼

그가 온다 대지의 땀구멍마다 식은땀으로 돋아 오른

비닐을 밟으며

 

로라는 라텍스 장갑을 낀 손으로 그의 안구를 조심스레 돌려 뺀다

홍채 인식 개찰구는 시간여행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장치지만

 

검은 동공의 외곽을 따라 은초록 빗선들이 무성한 무늬로 권해본다

그가 끄덕이고 로라는 빼낸 안구에 새 무늬의 홍채를 부착한다

땜질을 마치고 힘주어 원래 자리에 조립한다

잠시 스칠 때 묻었던 그의 지문을 닦아낸다

 

이번엔 통과할 수 있을까?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물을 때

이봐요, 마테, 어디에나 가볍고 질기고 부풀어 오르는 게 있어

로라는 곧 터질 비닐의 웃음으로 응답한다

늘 있는 일이야

실패에 대해 그가 말할 때

사실 실패는 백 년쯤 썩지 않지 땅속 깊이 파묻어도

로라는 그와의 대화를 재빨리 코팅한다

 

다시 그가 말한다

나는 잃었지만 가족들은 버림받았다 생각하겠지

늘 있는 일이야

 

로라가 작업대를 치우고 돈을 받고 마테를 보낸다

구석에 웅크린 여자아이를 향해 눈을 찡긋해 보인다

 

당신이 착용하려던 무늬였잖아요

그에게 더 필요한 것 같아

내 것과 같은 무늬였잖아요

너와 함께 걸어도 혼자 가는 것처럼 느껴져

혼자 걸어도 동행 같을 때가 있었잖아요

 

선반에 늘어선 인조 안구들이 형광빛을 내기 시작한다

흰 비닐의 달이 창틀에 엉덩이를 댄 채 움직이지 않는다

불면의 밤이 그대로 얼어붙는다

 

계간 『시와 세계』 2021년 가을호 발표

 

 


 

최세라 시인

서울 출생. 국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1년 《시와  반시》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복화술사의 거리』(시인동네, 2015)와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시와반시, 2020)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