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란 시인 / 간절기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담벼락 아래 당신에게로 가 닿지 못한 말들이 수북하다 희미한 꽃무늬 커튼의 기차를 타고 계절과 계절이 지나가는 바닷가 마을에 닿는다 해안으로 가는 골목의 울타리마다 누군가 먹다버린 팝콘처럼 아카시아 하얀 봉분이 줄지어 피어있다 먼 옛날 당신이 가고 싶은 나라가 어디냐고 물었을 때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떠올렸지 노천탕에 들어 전생의 업을 씻고 싶다고 했지 차가운 심장에 붉은 꽃잎차를 띄워 놓고 동그랗게 엉덩이를 말고 물장구를 치고 싶다고 했지 안부조차 물을 수 없는 날들이 무성한 가시의 말을 허공에 돋아 놓았다 바람의 체온과 구름의 깃털로 지어 놓은 둥지 속엔 부화되지 못한 밤의 문장이 그득하다 맨살로 웃는 당신의 저녁이 강가의 조약돌을 집어 들고 건너편 산그늘 속으로 저물어간다 뒤늦게 나타나 밤하늘을 차지한 뱀주인자리처럼 흘러간 것은 급류와 함께 떠밀려 간 세월만은 아니다 무성영화 속 먼저 누운 당신의 봉분을 향해 아카시아 꽃잎의 술잔을 올린다 사이드아웃의 엔딩 자막이 오르고 돌아보면 어둠의 터널 밖에서 흰 이를 드러내며 나를 향해 손짓하는 당신의 환한 출구가 보인다
― "시선", 2011년 여름호.
이미란 시인 / 내 남자의 사랑법
돌아누운 그의 등줄기 사이로 마른 바람이 분다 그 바람벽에 살을 묻고 울어 본 적이 있었던가 온전한 그림자의 알몸을 그의 등에 비비며 축축한 암술로 돋아나는 회한을 가닥가닥 엮어서 그의 등에 암각 된 성난 슬픔의 뿌리를 토닥이다가 잃어 버린 모성의 숲 내 비린 젖무덤 사이에 이 세상 가장 편안한 숨을 내려놓게 해주었던가
미안한 당신, 이라고 불러본다
내 남자의 등에 접혀진 얼룩무늬의 날개를 본다 나달나달하게 삭은 깊은 뒤란의 날개 속엔 오랜 세월의 먼지 속에서 골라낸 성근 햇빛과 달의 골수로 길러 낸 사향 노루의 주머니와 첩첩한 소금 창고 속 항아리 밑에 묻어 둔 그만의 황홀한 비문이 숨어있을 것이다 그 맨홀 속 같은 그리움의 뚜껑을 열고 들어가 별빛을 조명삼아 뒹글어 본 적 있었던가
미안했고 미안했던 당신, 이라고 불러본다
밤의 창문이 가로등 불빛을 포개며 돌아눕는다 저만큼 밀려난 등과 젖가슴의 간격이 휑하다 그의 등을 타고 온 마른 바람의 숲이 알타미라 동굴벽화의 구석기시대처럼 멀고 먼 야생의 무덤 같은 동굴의 입구를 지키고 서 있다 거기, 한 사나이의 꿈의 굽은 세월로 박혀있다 전생의 못다 푼 밀렵의 화살을 당기며 동굴 속 벽에 사향노루의 들판을 새겨 놓는다 거꾸로 도는 시계를 따라 해바라기처럼 퍼져가는
내 남자의 등에 매달리 빛나는 암각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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