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진 시인 / 갑자기 짚은 점자
무심코 계단 난간에 붙은 점자를 건드렸다 끼어서는 안 될 대화를 엿들은 사람처럼 모르는 여자의 가슴에 손이 스친것처럼 차가운 금속 요철이 손에 닿았다 얼떨결에 나는 나의 전생을 생각했다 나를 짚고 갔을 지문들 나는 그들에게 어떤 문자였을까 혹은, 나는 무엇을 짚고 이 생으로 건너왔을까 전생의 무덤같은 점자들을 스치면 이토록 불규칙한 저항이 우리의 언어였다니 그 거친 언어에 대해 비밀스런 속삭임에 대해 내가 모르는 약속에 대해 나도 모르는 나는 세상에 어떤 점자일까 잊히지 않는 것들이나 원망해야 할 추억들 나와 만났던 그렇고 그런 사람들의 이름들이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변명들을 눌러 새기며 자꾸만 늘어가는 내 질책의 무덤들은 어느 먼 다음 생에 누가 스치며 읽고 갈 점자일까.
전남진 시인 / 저울의 힘
저울이 버려져 있다. 무게만큼의 숫자가 나오는 부분이 떨어져 나간 채 수평을 잃은 발판에 조금씩 녹이 자라고 있다 더 이상의 무게를 말하지 못하는 저울 자신 위에 놓인 많은 질문들에게 답을 주었을 저울 저울이 정의 내린 숫자들이 세상에서 힘을 가졌을 때 그 힘으로 저울이 저울다울 수 있었을 때 그렇게 아름다웠던 저울은 지금 아파트 뒷길에서 하늘을 재며 녹슬고 있다
나는 가만히 버려진 저울 위에 올라가 앉아본다 잠시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진 세상에 앉아본다.
전남진 시인 / 되돌아가는 시간
할머니는 천천히 돌아가고 계신다 올 봄은 지난 봄으로 가고 올 진달래도 지난 봄으로 간다 마당에 핀 작은 목련도 지난해나 혹은 어느 먼 처녀적 마을로 돌아간다 돌아가다 잠깐씩, 어떤 날은 아주 오랫동안 가던 길을 선명하게 밟으며 돌아오신다 돌아가기에 올 봄이 너무 환했을까 돌아와 꽃잎 뜯어내듯 다시 가까운 과거부터 잃어버리고 먼 과거로 사뿐사뿐 걸어가신다 가시다가 지금은 세상에 없는 사람들을 만나고 시집온 그날로 가마 타고 가신다 가시다 돌아보면 아득한 얼굴들 어느새 되돌아와 식구들의 손을 들여다 보신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할머니는 그리운 어느 한 시절로 가고 계신다 언덕 넘어 개울 건너 내가없던 그때로 가고 계신다
전남진 시인 / 구부러진 못
정신 바짝 차리며 살라고 못이 구부러진다, 구부러지면서 못은 그만 수직의 힘을 버린다 왜 딴생각하며 살았냐고 원망하듯 못이 구부러진다 나는 어디쯤에서 구부러졌을까 살아보자고 세상에 박히다 다들 어디쯤에서 구부러졌을까 망치를 돌려 구부러진 못을 편다 여기서 그만두고 싶다고 일어서지 않으려 고개를 들지 않는 못 아니다, 아니다, 그래도 살아봐야 하지 않겠냐고 살다 보면 한 번쯤은 정신을 놓을 때도 있지 않겠냐고 겨우 일으켜 세운 못대가리를 다시 내려친다 그래, 삶은 잘못 때린 불꽃처럼 짧구나, 너무 짧구나 가까스로 세상을 붙들고 잘못 때리면 아직도 불꽃을 토해낼 것 같은 구부러져 녹슬어가는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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