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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혜은 시인 / 통증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2.

조혜은 시인 / 통증

―막내 이모에게

 

 

 나는 너의 마음이 될 수 있을까. 깨끗이 접어 올린 종이의 자국 같은 변명으로 너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아기는 잠이 드는 방법도 배워야 한대요. 우리는 죽음을 배울 수 있을까. 이모는 죽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이모들은 한여름의 나무에 배고픈 포도송이처럼 푸르게 매달려 있었다. 외할머니의 뱃속에서 순서대로 태어날 때 자매들은 어떤 방식으로 죽음의 순서를 배정받았을까. 자신에게 계획된 부당한 삶의 흔적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너는 마음이 될 수 없었다. 우리가 아픈 건 가깝기 때문일까 멀어지기 때문일까. 왜 항상 부족한 걸까. 감정은 요동치고 길은 말짱하고 날은 쨍쨍하고. 어긋나는 팔등. 나는 당신의 마음이 될 수 없었다.

 

 순환하는 불운. 어떤 하루와 어느 시간이 꼭 그만큼의 무게만을 가져올 때, 거리는 방정식으로 빛나고 도약은 싱그러울 때, 상처 없이 여름은 겨울이 될 수 있었을까. 다른 계절이 되어야 한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을까.

 

 내가 적어 놓은 글귀가 나를 침통하게 할 때, 개미의 손톱만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이모는 이해할 수 있어요? 생명을 준 엄마의 자궁이 이모의 몸에서는 죽음의 한 이유가 되었다는 걸. 사랑하는 우리가 서로를 미워할 구실을 찾아 복종한다는 걸. 이름 없는 숫자를 죽음의 순서를. 방학이 아름다웠던 날들을.

 

 나는 이별을 이해할 수 없어요. 겨울은 여름 같지 않고 나와 같지 않은 당신. 자매들의 마음은 흔들리고. 죽음에 익숙해질 때쯤 막내 이모는 왜 엄마가 되지 않았어요? 우리는 결코 서로에게 이해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엄마. 괜찮아. 많은 엄마들이 나를 다독이며. 나는 당신의 마음 같지 않다. 괜찮지 않은 것을 괜찮다고 말하며 그렇게 뿌리 깊은 어른이 된다.

 

 


 

 

조혜은 시인 / 구두코

 

 

처음 보는 파란 숲 속에서 내가 신은 높은 구두,

굽이 부러졌어요

 

돌 위에 앉아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 이별을 해요. 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나를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 구두코에 비춰봐요

 

당신은 나를 좋아할지도 몰라요

 

하루는 돼지 국밥에 빠진 아빠가 멀리 시장에서 근사한 외식 중이라고 전화를 하고. 하루가 다르게 삐뚤어져, 이제는 뺨 밖으로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입으로도 할머니는 아직 전화를 해요

 

늘 같은 말만 하는 당신의 투명한 속살들과 이별을 해요. 제 몸보다 흐린 고양이의 점박이 무늬를 훔쳐 달아나듯, 튼 살로 붙어 있던 여윈 귓등은 밀어내고

 

나는 심각하게 굴면 당신이 날 싫어할까 봐 짐짓 농담으로 나를 더 싫어하게 만들어요

처음 보는 파란 숲 속에서 나는 녹슨 안개처럼 우울해져요

 

하지만 당신은 나를 좋아할지도 몰라요

 

슬픔을 너무 우려먹어 뱃가죽이 얇아졌다는 아이

배고픔을 지우면 기뻐지나요?

우리의 사랑은 어디선가 근사한 외식 중이라고

 

어느 날 아름다운 제목의 책들을 만나고

그 이름들을 갖고 싶은 것처럼

책장 아래에 훔쳐 낸 받침의 기억을 받치고 있는 것처럼

 

나는 도시에는 없는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려 봐요

 

당신은 나를 좋아할지도 몰라요

 

언젠가 지하철에서 마구 겹쳐 팔리던

마르고 불행한 남자들 속에서

배가 부르고 여윈 눈을 지닌 여자들 속에서,

흘러간 노래들처럼 촌스럽게 당신이 그리워질까 봐

 

부러진 구두 굽을 떠올려 봐요

 

구두코에 비춰 봐요

 

당신은 나를 좋아할지도 몰라요

 

 


 

조혜은 시인

1982년 서울에서 출생. 강남대학교 특수교육학과 졸업. 2008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구두코』(민음사, 2012), 『신부 수첩』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