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봉 시인 / 보석
바닷속 조개의 자궁에서 크는 보석, 깨지기 쉬운 영혼, 건드리지 마라 함부로 상처를 주지 마라 누군들 상처가 아프지 않으랴 상처 난 과일이 향기를 만들지라도…… 향기의 영혼은 날아가기 쉽다 사라지기 쉽다 상처받은 영혼은 다 아프다 당신의 영혼도 상처받은 적 있다 두고두고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아프다 출렁출렁 상처받은 당신의 영혼 영혼의 상처는 언젠가 아문다 아무는 만큼 반짝반짝 보석이 영근다 모든 보석은 아리다 쓰리다 시리다 당신의 영혼 속 뽀얗게 이는 설움이라니 고개 들어 먼 하늘 바라보면 진주구름 송알송알 영글고 있다.
이은봉 시인 / 봄밭
월산리 부채밭에는 벌써 어린 새싹들, 뾰족뾰족 주둥이 내밀고 있다 새들도 날아와 지저귀고 있다 이 부채밭, 아주 오래된 곳이다 먼 옛날 백제 때부터 조상님들 대를 이어 일구어온 곳이다 올해도 농사를 지으려면 이곳 부채밭, 갈아엎어야 한다 트랙터가 있으면 좋겠다 쟁기라도 있으면 좋겠다 때가 되면 삽과 호미로라도 여기 부채밭, 갈아엎어야 한다 그래야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농사는 아득한 삼한 때부터 해온 일, 이미 봄이 훌쩍 와 있으니 삽과 호미라도 들고 나서야 한다 월산리 부채밭, 갈아엎지 않고 어찌 씨를 뿌리고 거름을 줄 수 있으랴 겁내지 마라 누가 뭐래도 봄은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는 계절!
이은봉 시인 / 민들레꽃
농협창고 뒤편 후미진 고샅, 웬 낯빛 뽀얀 계집애 쪼그려 앉아, 오줌 누고 있다 이 계집애, 더러는 샛노랗게 웃기도 한다 연초록 치맛자락 펼쳐, 아랫도리 살짝 가린 채 왼편 둔덕 위에서는 살구꽃 꽃진 자리, 열매들 파랗게 크고 있다 눈 내려뜨면 낮은 둔덕 아래, 계집애의 엄니를 닮은 깨어진 사금파리 하나, 반짝반짝 빛나고 있고.
이은봉 시인 / 패랭이꽃
앉아 있어라 쪼그려 앉아서 피워 올리는, 보랏빛 설움이여 저기 저 다스운 산빛, 너로 하여, 네 아픈 젖가슴으로 하여, 한결 같아라 하나로 빛나고 있어라
보랏빛 이슬방울이여 눈물방울이여 언젠가는 황홀한 보석이여 앉아서 크는 너로 하여, 네 가난한 마음으로 하여, 서 있는 세상, 온통 환하여라 환하게 툭, 터지고 있어라
이은봉 시인 / 흔들의자
흔들의자가 있어야겠다 흔들리는 세상 더욱 흔들리기 위하여
걸음 옮길 때마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저 마음들 보아라
흔들의자가 있어야겠다 흔들리는 세상 더는 흔들리지 않기 위하여!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숙자 시인 / 살아남은 니체들 (0) | 2022.04.12 |
---|---|
김명기 시인(울진) / 무너져 내리다 외 5편 (0) | 2022.04.12 |
조혜은 시인 / 통증 외 1편 (0) | 2022.04.12 |
박세미 시인 / 빛나는 나의 돌 외 1편 (0) | 2022.04.12 |
전남진 시인 / 갑자기 짚은 점자 외 3편 (0) | 2022.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