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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은봉 시인 / 보석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2.

이은봉 시인 / 보석

 

 

바닷속 조개의 자궁에서 크는 보석,

깨지기 쉬운 영혼, 건드리지 마라

함부로 상처를 주지 마라

누군들 상처가 아프지 않으랴

상처 난 과일이 향기를 만들지라도……

향기의 영혼은 날아가기 쉽다 사라지기 쉽다

상처받은 영혼은 다 아프다

당신의 영혼도 상처받은 적 있다

두고두고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아프다

출렁출렁 상처받은 당신의 영혼

영혼의 상처는 언젠가 아문다

아무는 만큼 반짝반짝 보석이 영근다

모든 보석은 아리다 쓰리다 시리다

당신의 영혼 속 뽀얗게 이는 설움이라니

고개 들어 먼 하늘 바라보면

진주구름 송알송알 영글고 있다.

 

 


 

 

이은봉 시인 / 봄밭

 

 

월산리 부채밭에는 벌써 어린 새싹들, 뾰족뾰족 주둥이 내밀고 있다 새들도 날아와 지저귀고 있다

이 부채밭, 아주 오래된 곳이다 먼 옛날 백제 때부터 조상님들 대를 이어 일구어온 곳이다

올해도 농사를 지으려면 이곳 부채밭, 갈아엎어야 한다

트랙터가 있으면 좋겠다 쟁기라도 있으면 좋겠다

때가 되면 삽과 호미로라도 여기 부채밭, 갈아엎어야 한다 그래야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농사는 아득한 삼한 때부터 해온 일, 이미 봄이 훌쩍 와 있으니 삽과 호미라도 들고 나서야 한다

월산리 부채밭, 갈아엎지 않고 어찌 씨를 뿌리고 거름을 줄 수 있으랴 겁내지 마라 누가 뭐래도 봄은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는 계절!

 

 


 

 

이은봉 시인 / 민들레꽃

 

 

농협창고 뒤편 후미진 고샅, 웬 낯빛 뽀얀 계집애 쪼그려 앉아, 오줌 누고 있다

이 계집애, 더러는 샛노랗게 웃기도 한다 연초록 치맛자락 펼쳐, 아랫도리 살짝 가린 채

왼편 둔덕 위에서는 살구꽃 꽃진 자리, 열매들 파랗게 크고 있다

눈 내려뜨면 낮은 둔덕 아래, 계집애의 엄니를 닮은 깨어진 사금파리 하나, 반짝반짝 빛나고 있고.

 

 


 

 

이은봉 시인 / 패랭이꽃

 

 

앉아 있어라

쪼그려 앉아서 피워 올리는, 보랏빛 설움이여

저기 저 다스운 산빛, 너로 하여, 네 아픈 젖가슴으로 하여, 한결 같아라

하나로 빛나고 있어라

 

보랏빛 이슬방울이여

눈물방울이여

언젠가는 황홀한 보석이여

앉아서 크는 너로 하여, 네 가난한 마음으로 하여, 서 있는 세상, 온통 환하여라

환하게 툭, 터지고 있어라

 

 


 

 

이은봉 시인 / 흔들의자

 

 

흔들의자가 있어야겠다

흔들리는 세상

더욱 흔들리기 위하여

 

걸음 옮길 때마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저 마음들 보아라

 

흔들의자가 있어야겠다

흔들리는 세상

더는 흔들리지 않기 위하여!

 

 


 

이은봉(李殷鳳) 시인

1953년 충남 공주(현재 세종시) 출생.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 1984년 《창작과 비평》 신작시집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시집으로 『좋은 세상』 『봄 여름 가을 겨울』 『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 『무엇이 너를 키우니』 『봄바람, 은여우』 『생활』 등이 있고, 시조집으로 『분청사기 파편들에 대한 단상』이 있음. 평론집으로 『시와 생태적 상상력』, 『시와 깨달음의 형식』 등이 있음. 현재 광주대 명예교수, 대전문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