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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숙자 시인 / 살아남은 니체들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2.

정숙자 시인 / 살아남은 니체들

 

 

그들, 발자국은 뜨겁다

그들이 그런 발자국을 만든 게 아니라

그들에게 그런 불/길이 주어졌던 것이다

 

오른발이 타버리기 전

왼발를 내딛고

왼발 내딛는 사이

오른발을 식혀야 했다

 

그들에게 휴식이라곤 주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도움이 될 수도 없었다

태어나기 이전에 벌써

그런 불/길이 채워졌기에!

 

삶이란 견딤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 목록은 자신이 택하거나 설정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럴 수밖에 없었으므로 왼발과 오른발에 (끊임없이) 달빛과 모래를 끼얹을 뿐이었다.

 

우기(雨期)에조차 불/길은 식지 않았다. 혹자는 스스로, 혹자는 느긋이 죽음에 주검을 납부했다… 고, 머나먼… 묘비명을 읽는 자들이… 뒤늦은 꽃을 바치며… 대신… 울었다.

 

늘 생각해야 했고

생각에서 벗어나야 했던 그들

피해도, 피하려 해도, 어쩌지 못한 불꽃들

결코 퇴화될 수 없는 독백들

물결치는 산맥들

 

강물을 거스르는 서고(書庫)에서, 이제 막 광기(狂氣)에 진입한 니체들의 술잔 속에서… 마침내 도달해야 할… 불/길, 속에서… 달아나도, 달아나도 쫓아오는 세상 밖 숲속에서.

 

계간 『시인동네』 2016년 봄호 발표

 

 


 

정숙자 시인

1952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을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감성채집기』, 『정읍사의 달밤처럼』, 『열매보다 강한 잎』, 『뿌리 깊은 달』,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과  산문집 『밝은음자리표』, 『행복음자리표』가 있음. 동국문학상 · 질마재문학상 · 들소리문학상 등 수상.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