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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명기 시인(울진) / 무너져 내리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2.

김명기 시인(울진) / 무너져 내리다

 

 

춘천 갔다 돌아오는 길

청량리서 용산 오는 전철 타고

옥수동쯤, 굼뜬 몸으로 허겁지겁

미처 내리지 못한 노인이

창밖 지는 노을을 향해 마른 침 삼키며

물끄러미 뱉어 내시는 말씀

 

늙으면 다 빙신인 기라

 

물집처럼 궁글어 터져버린 그 말씀

굽은 등허리 타고 진물처럼 천천히 흘러

내게 오는 동안 나는 속없이

쓸쓸하다 서러워진다

저 늙은 빙신의 굽은 등짝도

한 시절 쏟아져 내리는 세상의 부하를

든든히 받쳐내던 옹벽이었으리라

일 없다는 듯 열차는 이승의 가운데를

철컹철컹 가로질러 가는데 천장에서

모습 없는 젊은 여자, 타박이라도 하듯

한남동이니 어서 내리라고 성화다

 

덧없는 생의 결장 같은 문이 스르르 열리자

노을에 걸려 위태롭게 끄덕대던 오래된 옹벽 하나

어둠 밀려드는 강의 남쪽으로 무너져 내린다

 

김명기, 『종점식당』, 애지, 2017년, 74~75쪽

 

 


 

 

김명기 시인(울진) / 부러진 사다리가 있는 저녁

 

 

한쪽 다리 부러진 채 담벼락에 기댄 늙은 사디리 하나 있다

 

부러진다는 것은 견디지 못한다는 것

차라리 노역이 아름다웠을 저 몸

부러진 채 얼마나 오랜 불구의 시간을 또 견뎠을까

쉼 없이 시공을 내딛는 것들은

언젠가 한번은 부러질 날을 향해 가는 것

그것들의 이며도 차마 저렇게 아름다울까

부러진 채 어딘가에 기대

오래도록 불구의 시간을 건널 수 있을가

낡은 이불처럼 숨죽은 저녁

한 무리 멧새들 그 노구 위에 가볍게 앉아

부러진다는 것은 쓸모의 다함이라 지절대다

진 빠진 옹이빛 그늘 속으로 사라지고

독촉하듯 내리는 어둠의 언저리

볼품없는 제라륨 몇 송이만 더욱 붉다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김명기, 문학의 전당, 2009년, 13쪽

 

 


 

 

김명기 시인(울진) / 집의 울음소리 듣는 그믐밤

 

 

젖살 같은 함박꽃이 뜨거운 몸을

송두리째 내던지는 그믐밤

꽃잎마냥 웅크린 채 오지 않는 잠을 보채다

집이 우는 소리 듣는다

생의 대부분을 타관에서 떠돈 무인년 범띠 늙은 아버지

마지막 토굴 같은 나무집이 울고 있다

 

구석진 보꾹에서 꺼억꺽

오늘밤은 관자놀이쯤에서 두통이 생겼나보다

이따금 아귀 잘 맞지 않는 야매 틀니처럼 창틀이나

문틀이 뒤틀리며 치통 앓는 것을 본 적도 있다

 

관심 밖으로 밀려나면

쪼개지며 튕겨져 나가버리는 사랑처럼

어느 한 세월도 관심 받지 못한 몸은

서러웠을 것이다

목상들로부터 외면당한 뇌성마비 같은 몸

헐값이란 이유로 팔려와 흔한 목수 하나 없이

오직 삭정이 같은 손끝에서

이태 동안 얼기설기 엮인 집

자해하듯 제 몸에 상처 내며 튕겨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불룩한 벽 틈에서 배앓이 끝, 설사 같은

붉은 진흙이 스르르 흘러내리고

돈 없어 일본산 히노키*를 못 썼다며

재생 불가능한 생처럼 침침한 어둠 속으로

등을 들썩이며 헛기침을 밀어내는 아버지

 

보채도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다

운다고 옛사랑이 돌아오지 않듯

돌아갈 청춘이 없는 아버지의 굽은 등과

다시는 어디론가 뻡어갈 수 없는 나무집이

밤새 우는 소리 듣는 한없는 그믐밤

 

* 일본산 노송

 

- 김명기 시집『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2009

 

 


 

 

김명기 시인(울진) / 막걸리집 미자씨

 

 

막걸리집 이름이다 천상 막걸리 집을 위해 지어진 이름 같다

낮은 슬레이트 지붕, 흙 바른 천장, 자그마한 방들, 그 방 안

에 녹아들어 취한 사내들

 

그 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건너편 작은 창고 양철지붕 위로 탕탕 떨어지는 설익은 땡감

소릴 듣다가

아, 듣다가

 

사는 게 얼마나 버거우면 저 푸르고 단단한 것들이 투신할까

 

한때 많은 푸르름들이 저렇듯 사라져갔지

단단하였지만 단단함만으로 살 수 없어 세상에 그 단단함을

내던졌던

죄많은 소문이 그들을 묻었고 그리고 잊혀져갔지

 

그들의 푸른 피를 수혈 받은 세상은 이렇듯 안녕한데

 

오늘 밤

잘 익은 술에 취해가는 것

취한 술에 내가 푹 익어가는 것

어쩌면 그것은 모든 단단한 것에 대한 미안함인지도 모른다

 

며칠째 비가 내린다

 

그 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깊은 어둠만큼이나 울울해진 가슴을 만지며

오지 않을 별들을 기다리며

 

 


 

 

김명기 시인(울진) / 추석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가 심어놓은

대추나무에 매달려 봉양 꼬챙이로 대추를 턴다

긴 가뭄 끝 갈라지며 쪼그라든 검붉은 대추 속내

식구들이 오랫동안 파먹어 팍삭 오그라든 아버지 같다

 

부엌에서

늙은 엄마, 송편 익반죽을 치댄다

구박 안에서 몸을 굴릴수록 탱탱해지는 멥쌀 반죽

나들 문가에 걸린 흑백 사진 속

처녀 적 엄마처럼 뽀얗다

 

아침마다 한 움큼씩 빠지는

윤기 없는 아버지 머리카락처럼

바람 불 때마다 떨켜를 놓쳐버린

버짐 같은 감잎 위를 형제 같은

중년의 개 두 마리 어슬렁거린다

 

가지가 휘어지도록 열매 달린

꽃사과 나무 그늘 아래

사촌의 딸아이 닮은 노란 애기똥풀이

잠을 보채듯 몸을 뒤채고

수수꽃다리 나무 곁 어떻게 혼자 살았는지

영문 알 수 없는 덜 여문 수숫대에

연푸른 수수 알맹이들이 빤들빤들 익어간다

 

김명기, 『종점식당』, 애지, 2017년, 68~69쪽

 

 


 

 

김명기 시인(울진) / 외 다수

 

 

나는 시를 잘 모른다.

고백하자면 사실 그렇다. 일전 이승훈 시인의 무려

열네 번째 시집 <이것은 시가 아니다>를 읽어보니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뭐 그랬다. 그의

시 중에는 <모두가 시다>라는 시도 있다. 그런 대가도

가끔씩은 헷갈리나보다.

 

"문학에 올인 하지 마라" 문단 말석에 얼굴을 내비칠

때 고등학교 은사이신 이 모 소설가께서 내게 하신

참 의미 다양한 말씀이다. 이 또한 그런 것 같고

아닌 것도 같다.

 

"나는 말이야 내가 시인이란 걸 잊고 살다 가끔 집으로

보내오는 문예지들과 시집들을 받으면 그제서야

내가 글쟁이구나 하고 생각해" 라고 말하는 어느 선배

시인의 말을 들을 땐 그냥 코웃음을 쳤다. 히힝~, 나는

그가 누구보다도 출세 지향적 시인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어느술자리에서는고료안주는문예지에는원고를주지

말아야한다고빙긋웃으며말하기도했는데나는그게웃으며

할얘긴가라고생각하며그러면나같은놈에겐그공짜청탁

조차안들어올텐데라고걱정도했다그래도그의시는참좋다

그러니그런말도할수있는건가?

 

보라! 나름 명망들은 늘 뭔가 안다는 투로 말하고 쓴다.

그 외 다수의 생각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응?

 

계간 <미네르바> 2013. 봄호

 

 


 

김명기 시인(울진)

1969년 경북 울진 출생. 관동대 산업공학과 졸업. 2005년 계간지 「시평」으로 작품활동시작. 시집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가 있음. 맛 칼럼집 『울진의 맛 세상을 만나다』 발간. 2014년 두 번째 시집 『종점식당』 발간. 2005년 '문학나무'와 '시현실' 신인상. 현재 강원 작가회의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