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란 시인(상주) / 흰 시간 검은 시간
그 많은 흰 시간은 모두 어디로 가나 그 많은 모래알 같은 아침들, 그 많은 팥알 같은 저녁들, 그 많은 사약 같은 밤들, 내가 다 먹지 푹푹 내가 다 퍼먹고, 후루룩 들이마시고, 구석구석 시간의 뼈와 뼈 사이 알뜰히 내가 다 파먹지 시간을 뜸이 잘 들게 짓는 일은 내 몫, 시간의 가시 사이 살점을 잘 발라 먹는 일도 내 몫, 시간을 편식 없이 골고루 먹이는 일도 내 몫, 시간을 먹으며 나이를 먹지 이를 다 먹어버린 입을 오물거리지 잇몸으로 천천히 사탕을 빨아먹지 느리게 느리게 시간을 녹여 먹지 도둑처럼 검은 요리사가 시간의 부엌에 쳐들어오면 내가 짓지 않은 시간이 차려지지 간이 맞지 않는 시간의 식탁, 남이 지은 새벽, 남이 지은 오후, 남이 지은 시간의 맛은 낯설어, 남이 지은 시간은 먹을수록 허기가 지지, 방금 저녁을 먹고도 안 먹었다고 시침을 떼지 밥 달라고, 시간 더 달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지
최정란 시인(상주) / 여우장갑
솜털이 보송보송한 앞발이 쏘옥 들어가는 작은 주머니 같은 장갑입니다. 여우가 앙증맞고 깜찍한 앞발을 밀어 넣습니다. 눈 덮인 하얀 겨울산을 향해 귀를 세웁니다. 눈 위에 콩콩 발자국을 찍으며 작고 예쁜 여우가 뛰어갑니다.
이제 발 대신 손이라고 불러야 하는 앞발을 엉거주춤 들고 여우는 직립을 시작할지 모릅니다.
장갑 한 켤레 때문에 여우가 직립을 시작한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중학교 일 학년 교과서에 직립이 인간을 다른 짐승과 구별하는 요소라고 쓰지 않을 것입니다. 앞발을 사용하게 된 여우들의 문명이 시작될 것입니다. 여우들은 여우문명의 발상 원인을 한 마디로 장갑 때문이라고 밝힐 것입니다. 최초로 장갑을 낀 여우를 기억할 것이고 그의 영생을 위한 피라미드를 세울 것입니다.
아니, 여우들만 올라갈 수 있는 비밀스런 곳에 여우장갑 한 송이를 피워두고 사람들의 것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도 모릅니다.
보드라운 흙이 맨살에 닿는 날 것의 느낌, 차가운 눈이 발에 닿아 온몸의 세포들이 찌르르 살아나는 느낌을 모르고, 사람들은 쓸모 없는 물건들로 앞발을 무디게 욱죄는 참 이상한 취미를 가졌다고 깔깔거리며 웃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우장갑은 현명한 암여우처럼 제 몸을 좀체 드러내지 않습니다. 아직도 덫에 걸리지 않고 잘도 피해 다니고 있습니다.
여우장갑을 보호하고 계시거나, 보관하고 계신 분은 부디 연락바랍니다.
시집 <여우장갑> 2007년 문학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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