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시인 / 고흐, 리듬 앤 블루스
그랬겠지 아마도 그랬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은 죄악이잖나
출출하군 맨 먼저 자네를 찾아 모자를 벗고 노란 다알리아꽃을 바치는 게 마땅하나 빈속으로는 저 찬란한 밀밭 위 태양에게 질식당할 것만 같아 나 홀로 풀밭 위의 식사를 즐기려네 자네가 누워 있는 너머 유채밭에서 말이야 아침 일찍 퐁투아즈행 기차를 타고 생투앙 로몬을 지나 오베르 쉬르 와즈역 앞, 거기 모로코 카페가 있더군 난 카페오레 한 잔으로 자네 맞을 준비를 했다네 카페 아랫마을로 가다 보면 공원 앞마당에 자네가 흔들리며 서 있더군 해진 청동 옷에 캔버스와 화구를 크로스로 멘 채 이리저리 골목을 헤매었을, 광대뼈 불거진 고집도 이곳에선 태양에게 녹아 항복했을 터이고... 꽃 속에 환한 시청사 맞은편 자네의 한 평 다락방도 봄날엔 빛나는구먼 마을 뒤 오베르성당 앞에 잠시 멈추었지 그림이 성당인지 성당이 그림인지 오솔길 너머 불타고 있을 밀밭 생각에 몹시 흥분됐다네
며칠 전 아를에 들렀었지 자네도 떠나고 별빛 테라스도 문을 닫았더군 론강 둑에 앉아 로제와인을 마시고 저녁노을을 어르고 달래다 별밤을 뒤로했지 자네가 그토록 원하던 절대적인 휴식이 론강에 밤하늘에 넘쳐흘렀다네 내 식사는 바나나 한 개 크루아상 하나 그리고 와인 한 병 어때 근사하지 않나? 자, 먼저 한 잔 받으려는가
저기 황톳길을 고개 숙이며 걷다가 사거리에서 서성이는 밀짚모자 쓴 한 사내 등짝을 치면 버럭 화를 낼 것 같은 강파른 사내 화구를 덕지덕지 둘러메고 수레국화 남빛처럼 파리한 사내
이 황톳빛 사거리에서 길을 잃었으면 좋겠네 도리어, 잃어버렸던 길도 잃어버리려 애쓰는 길도 이곳에선 또렷이 살아나는구먼
여기 누워 햇살을 아껴 베어 먹고 모처럼 단잠에 든 자네를 보니 내 어깨가 한결 가벼워지는 거야 눈물이 흐르네 오해하진 말게 이건 구 개월 뒤 자네 곁에 누운 테오에게 바치는 눈물이라네 한걸음 좀 더 일찍 왔더라면 자네의 가난을 한 스푼이라도 덜어 줄 수 있었을까만 절망은 죄악이잖나 두 석관 위 송악이 끈끈하여 얽히고설킨, 내 위로를 대신하는구먼 속절없이 담벼락 아래 튤립 수선화는 왜 이리도 환한 것이냐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만든 올가미에 걸려 밀밭 위를 버둥거리는지도 몰라 어쩌면 우리는 밀밭에서 태어나서 밀밭에서 뒹굴다 밀밭에서 죽는지도... 내가 타히티를 목적으로 삼을 때 불행은 시작됐지 타히티는 열정이 도달하기도 전 앞서 타 버리는 곳 푸드덕 잿빛 새 한 마리 유채밭을 날고 자네가 토해 놓은 붉은 목적이 밀밭에 푸르게 출렁이는 듯하네 아직도 미처 도착하지 않은 편지를 자네가 사랑한 칠십 일을 다 읽어 내지 못하겠군 참, 닥터 가셰는 안녕하신지?
자네가 램프 아래 고단한 감자를 떠났듯 언제든 화구도 팽개치고 달랑 맨몸으로 오게나 와운마을에 둥둥 떠 있어도 좋고 만재도 몽돌과 뒹굴어도 좋고
목적 밖으로,
아마도 오늘은 라부여관에서 하룻밤 묵어 갈 걸세 자 받게나 남루 한잔 권커니 잣거니 자네의 정원에 다시는 검은 고양이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사이프러스나무가 춤추도록…
월간 『시와 표현』 2016년 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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