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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선 시인 / 고흐, 리듬 앤 블루스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2.

정선 시인 / 고흐, 리듬 앤 블루스

 

 

  그랬겠지

  아마도 그랬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은 죄악이잖나

 

  출출하군

  맨 먼저 자네를 찾아 모자를 벗고

  노란 다알리아꽃을 바치는 게 마땅하나

  빈속으로는 저 찬란한 밀밭 위 태양에게 질식당할 것만 같아

  나 홀로 풀밭 위의 식사를 즐기려네

  자네가 누워 있는 너머 유채밭에서 말이야

  아침 일찍 퐁투아즈행 기차를 타고 생투앙 로몬을 지나

  오베르 쉬르 와즈역 앞, 거기 모로코 카페가 있더군

  난 카페오레 한 잔으로 자네 맞을 준비를 했다네

  카페 아랫마을로 가다 보면

  공원 앞마당에 자네가 흔들리며 서 있더군

  해진 청동 옷에 캔버스와 화구를 크로스로 멘 채

  이리저리 골목을 헤매었을,  

  광대뼈 불거진 고집도 이곳에선 태양에게 녹아 항복했을 터이고...  

  꽃 속에 환한 시청사

  맞은편 자네의 한 평 다락방도 봄날엔 빛나는구먼

  마을 뒤 오베르성당 앞에 잠시 멈추었지

  그림이 성당인지 성당이 그림인지

  오솔길 너머 불타고 있을 밀밭 생각에 몹시 흥분됐다네

 

  며칠 전 아를에 들렀었지

  자네도 떠나고

  별빛 테라스도 문을 닫았더군

  론강 둑에 앉아 로제와인을 마시고

  저녁노을을 어르고 달래다 별밤을 뒤로했지

  자네가 그토록 원하던

  절대적인 휴식이 론강에 밤하늘에 넘쳐흘렀다네

  내 식사는 바나나 한 개 크루아상 하나

  그리고 와인 한 병

  어때 근사하지 않나?

  자, 먼저 한 잔 받으려는가

 

  저기 황톳길을 고개 숙이며 걷다가

  사거리에서 서성이는 밀짚모자 쓴 한 사내

  등짝을 치면 버럭 화를 낼 것 같은 강파른 사내

  화구를 덕지덕지 둘러메고 수레국화 남빛처럼 파리한 사내

 

  이 황톳빛 사거리에서 길을 잃었으면 좋겠네

  도리어, 잃어버렸던 길도

  잃어버리려 애쓰는 길도 이곳에선 또렷이 살아나는구먼

 

  여기 누워 햇살을 아껴 베어 먹고

  모처럼 단잠에 든 자네를 보니

  내 어깨가 한결 가벼워지는 거야

  눈물이 흐르네

  오해하진 말게

  이건 구 개월 뒤 자네 곁에 누운 테오에게 바치는 눈물이라네

  한걸음 좀 더 일찍 왔더라면

  자네의 가난을 한 스푼이라도 덜어 줄 수 있었을까만

  절망은 죄악이잖나

  두 석관 위 송악이

  끈끈하여 얽히고설킨, 내 위로를 대신하는구먼

  속절없이 담벼락 아래 튤립 수선화는 왜 이리도 환한 것이냐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만든 올가미에 걸려

  밀밭 위를 버둥거리는지도 몰라 어쩌면 우리는

  밀밭에서 태어나서

  밀밭에서 뒹굴다

  밀밭에서 죽는지도...

  내가 타히티를 목적으로 삼을 때

  불행은 시작됐지

  타히티는 열정이 도달하기도 전

  앞서 타 버리는 곳

  푸드덕

  잿빛 새 한 마리 유채밭을 날고

  자네가 토해 놓은 붉은 목적이 밀밭에 푸르게 출렁이는 듯하네

  아직도 미처 도착하지 않은 편지를

  자네가 사랑한 칠십 일을

  다 읽어 내지 못하겠군

  참, 닥터 가셰는 안녕하신지?

 

  자네가 램프 아래 고단한 감자를 떠났듯

  언제든 화구도 팽개치고

  달랑 맨몸으로 오게나

  와운마을에 둥둥 떠 있어도 좋고

  만재도 몽돌과 뒹굴어도 좋고

 

  목적 밖으로,

 

  아마도 오늘은 라부여관에서 하룻밤 묵어 갈 걸세

  자 받게나

  남루 한잔 권커니 잣거니

  자네의 정원에 다시는 검은 고양이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사이프러스나무가 춤추도록…

 

 월간 『시와 표현』 2016년 1월호 발표

 

 


 

정선 시인

전남 함평에서 출생. 전남대 국문학과 졸업. 2006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 『랭보는 오줌발이 짧았다』(천년의시작, 2010)와 에세이집 『내 몸 속에는 서랍이 달그락거린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