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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세미 시인 / 빛나는 나의 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2.

박세미 시인 / 빛나는 나의 돌

 

 

발밑을 지키는 것이

나의 사명입니다

돌이 빛나는 유일한 자리죠

 

언어가 끝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것은

인간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발바닥으로 돌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배반합니다

내 손으로 내 돌을 깨뜨려 옆 사람을 겨냥했다가

수면제를 삼키듯 증거를 인멸하면

새까맣게 타버린 돌은 잠 속으로 들어와

주로 악몽을 짓는 데 쓰입니다

 

기도의 형식은

맞댄 두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꿇어앉아 하늘을 향해 포갠 발바닥에 있습니다

거기엔 빛나는 돌이 놓여 있죠

 

하지만

누군가 내게 와서

서로의 발바닥을 맞댐으로 사랑에 빠지자,

말한다면 나는 기꺼이

졸도할 것입니다

두 발바닥을 활짝 펴고서

 

ㅡ 시집 『내가 나일 확률』(문학동네, 2019)

 

 


 

 

박세미 시인 / 잠의 마천루

 

 

손잡이를 쥐어본 적 없이

입장

 

빌딩 꼭대기에 옷이 걸린 채 매달려 있으며

곧 추락할 것이며

곧 바닥이 나타나리라는 잠의 거짓말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며

세차게 수직으로 흐르는 유리창에 좀처럼 손이 닿지 않을 것이며

그러나 곧 양손에 커다란 이불이 펼쳐질 것이며

다리를 흔들어 보게 될 것이며

 

바닥이 없는 이 도시에서

발바닥에 눈을 달고

떨어지는 눈물의 마지막을 목격한다

 

정수리에 툭 떨어진 한 방울에

위를 올려다보면

맑다

맑아서

 

위와 아래로만 생성되는 골목

다리가 길어지다가

이불을 놓친다

 

월간 《시인동네》 2019년 9월호

 

 


 

박세미 시인

1987년 서울에서 출생, 강남대학교 건축공학과 졸업.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석사과정. 2014년 《서울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내가 나일 확률』이 있다. 월간 <SPACE>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