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미 시인 / 빛나는 나의 돌
발밑을 지키는 것이 나의 사명입니다 돌이 빛나는 유일한 자리죠
언어가 끝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것은 인간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발바닥으로 돌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배반합니다 내 손으로 내 돌을 깨뜨려 옆 사람을 겨냥했다가 수면제를 삼키듯 증거를 인멸하면 새까맣게 타버린 돌은 잠 속으로 들어와 주로 악몽을 짓는 데 쓰입니다
기도의 형식은 맞댄 두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꿇어앉아 하늘을 향해 포갠 발바닥에 있습니다 거기엔 빛나는 돌이 놓여 있죠
하지만 누군가 내게 와서 서로의 발바닥을 맞댐으로 사랑에 빠지자, 말한다면 나는 기꺼이 졸도할 것입니다 두 발바닥을 활짝 펴고서
ㅡ 시집 『내가 나일 확률』(문학동네, 2019)
박세미 시인 / 잠의 마천루
손잡이를 쥐어본 적 없이 입장
빌딩 꼭대기에 옷이 걸린 채 매달려 있으며 곧 추락할 것이며 곧 바닥이 나타나리라는 잠의 거짓말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며 세차게 수직으로 흐르는 유리창에 좀처럼 손이 닿지 않을 것이며 그러나 곧 양손에 커다란 이불이 펼쳐질 것이며 다리를 흔들어 보게 될 것이며
바닥이 없는 이 도시에서 발바닥에 눈을 달고 떨어지는 눈물의 마지막을 목격한다
정수리에 툭 떨어진 한 방울에 위를 올려다보면 맑다 맑아서
위와 아래로만 생성되는 골목 다리가 길어지다가 이불을 놓친다
월간 《시인동네》 2019년 9월호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은봉 시인 / 보석 외 4편 (0) | 2022.04.12 |
---|---|
조혜은 시인 / 통증 외 1편 (0) | 2022.04.12 |
전남진 시인 / 갑자기 짚은 점자 외 3편 (0) | 2022.04.11 |
손순미 시인 / 해당화 필 때 외 1편 (0) | 2022.04.11 |
이미란 시인 / 간절기 외 1편 (0) | 2022.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