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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정란 시인 / 돌탑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1.

이정란 시인 / 돌탑

 

 

아무리 높이 솟아 있어도

홀로 선 돌을 탑이라 하지 않는다.

셋이서 다섯이서

받쳐 주며 높아질 때 탑이 된다.

 

산길 한쪽에

아무렇게나 쌓아진 돌탑이

흔들리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건

 

저를 쓰러뜨리려고 수없이 다녀간 바람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돌과 힘

힘과 돌 틈으로

화기를 보내 주었던 때문이다

 

훗날

하늘 한 겹 끌어다 틈을 메워 주는

바람의 보은으로

탑은 더욱 견고해진다.

 

 


 

 

이정란 시인 / 나

 

 

당신 기척이 밖을 내다보는 내 시선에 녹아들었다

해변, 모래밭에 꽂힌, 종이컵은 인력 강하지만 아주 우연한 접점

 

당신 바깥에서

나는 허공이나 모니터에서 샘솟듯 차오르는 글자들을 소비한다

글자는 의식의 발원지

의식은 허공이나 모니터 혹은 벚나무 속의 혈류다

 

당신 곁 가장 가까운 곳에서 당신을 틀어막으며 산 긴 시간

마개를 따 버리고 싶었던 나는 누구의 나인가

 

내게서 떠났던 영혼은 연필로 위장한 낱말들의 트렁크 속으로 숨어들어 거칠게 숨 쉬었다

 

긴 잠의 머리맡에 가끔 폭약을 장치한다

나를 잘못 번안하곤 슬그머니 잠들어 버리는 나를 발설하기 위해

 

자기에 맞는 나에 대해 명상하듯

익숙한 옷이 나를 벗어버리고 면벽 중이다

 

변화하는 칼집, 나는

늘 죽고 있다

 

 


 

이정란 시인

1959년 서울에서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1999년 《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어둠ㆍ흑맥주가 있는 카페』(들꽃, 2001)와 『나무의 기억력』(종려나무, 2007), 『눈사람 라라』가 있음. 계간 『詩로 여는 세상』 편집장으로 활동 中. 2019년 서울문화재단 예술가 지원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