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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수련 시인 / 목각수탉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1.

임수련 시인 / 목각수탉

 

 

처음 저 나무는

숲 가운데 서서 습관처럼

햇살과 빗물이 차려주는 식사를 했을 것이고

열매 하나하나가 한 그루씩 나무로

씩씩하게 서서 푸른 숲 일궈나가는 것

보고 또 보았을 것이다

밤이면 달빛 아래 쑥쑥 나이를 먹는 제 그림자 보며

나무로 살다가 나무로 죽는 것이 옳은걸까

깊은 생각 속을 서성거렸을 것이다

어느날 이웃 마을의 울타리에서 뛰쳐나온

붉은 벼슬 수탉 한 마리

배고픈 이슬 쪼으며 도도하게 숲길 거닐다가

백양나무 가지 위로 펄쩍 뛰어올라

홰를 치며 새벽 깨우는 것을

곧 바로 어둠이 걷히고

황금옷 걸친 태양도 수탉 앞에 엎드리는 것을

눈 휘둥그레 보았을 것이다

수탉은 또 이런 애기를 나무에게 들려주었겠지

하찮은 것 같은 닭 울음이 덩치 큰 사내의 곡성으로

바뀐 기적을 알고 있니?

세 번씩이나 스승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때맞춰 깨달음을 건넨 이는 우리의 먼 할아버지야

우린 기적을 일궈낸 할아버질

까마귀선생 은빛별이거나 늑대 왕 로보처럼 우러르지

그때부터 저 나무,

누군가를 깨치는 삶을 꿈꾸며

새벽마다 홰를 치며 곁가지 털었을까

베어질 몸의 나이테 안에 수탉울음 쟁여 놓았을까

멀고 먼 성지에서 날아 온

목각 수탉 한 마리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날마다 내 정신을 깨우고 있다

 

<2007년 월간엣세이 발표>

 

 


 

 

임수련 시인 / 달팽이시인

 

 

맨발의 작은 그 사내

수련꽃 피는 칠월이면

우리에게로 온다, 시집 한 권 내밀며.

흠과 티가 없는 사내의 시집, 순백의 문장이다

푸른 잎의 길 느릿느릿 산책하는

그의 투명한 발을 닮았다

쓰다듬듯 햇살이 페이지를 넘겨야

환히 읽어낼 수 있는 작품

바람도 파르르 떨며 낭송하는 순결한  문체를 우리는

칠월이 피고 질 때까지

항아리처럼 꽃그림자처럼 푸른 이파리처럼

젖은 채 읽어낸다

해마다 시집 꽃송이 들고 나왔다가

가을이 오면  줄기과 잎,

제가 왔던 길을 모두 거두고

캄캄한 독락당으로 돌아가는  

그 사내가 수련뿌리 속에 산다는 걸

지지난해 수생식물원 해설사가 자세히 알려주어 알았다

긴 겨울밤 그 적막한 독락당에 귀 기울여보면

사각사각 연필 깎는 소리

파지 던지며 흐느끼는 소리

항아리 안에서 파문을 일으키고

바람타고 항아리 안을 거니는 달빛을 일렁이고

내 마음 바다에 해일을 일으키는,

 

해마다  수련이 피워내는 한송이 꽃을   

달팽이시인의 시집!

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가족은

달팽이시인의 건강을 기도하는 오래된 독자이다

 

 


 

임수련 시인 / (본명 임외자)

경남 통영 출생. 한국방송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주문예대학 수료. 경주대학교 시회교육원 문예창작반. 현대중공업주최 전국백일장 시부문 은상 수상. 신라문화재백일장 시 부문 최우수상 수상. 방송대 학우문학상 시 부문 최우수상 수상. 2003년 대전일보 시 부문 최종심. 2006년 서울신문 시 부문 최종심. 2007년 영남일보 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