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련 시인 / 목각수탉
처음 저 나무는 숲 가운데 서서 습관처럼 햇살과 빗물이 차려주는 식사를 했을 것이고 열매 하나하나가 한 그루씩 나무로 씩씩하게 서서 푸른 숲 일궈나가는 것 보고 또 보았을 것이다 밤이면 달빛 아래 쑥쑥 나이를 먹는 제 그림자 보며 나무로 살다가 나무로 죽는 것이 옳은걸까 깊은 생각 속을 서성거렸을 것이다 어느날 이웃 마을의 울타리에서 뛰쳐나온 붉은 벼슬 수탉 한 마리 배고픈 이슬 쪼으며 도도하게 숲길 거닐다가 백양나무 가지 위로 펄쩍 뛰어올라 홰를 치며 새벽 깨우는 것을 곧 바로 어둠이 걷히고 황금옷 걸친 태양도 수탉 앞에 엎드리는 것을 눈 휘둥그레 보았을 것이다 수탉은 또 이런 애기를 나무에게 들려주었겠지 하찮은 것 같은 닭 울음이 덩치 큰 사내의 곡성으로 바뀐 기적을 알고 있니? 세 번씩이나 스승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때맞춰 깨달음을 건넨 이는 우리의 먼 할아버지야 우린 기적을 일궈낸 할아버질 까마귀선생 은빛별이거나 늑대 왕 로보처럼 우러르지 그때부터 저 나무, 누군가를 깨치는 삶을 꿈꾸며 새벽마다 홰를 치며 곁가지 털었을까 베어질 몸의 나이테 안에 수탉울음 쟁여 놓았을까 멀고 먼 성지에서 날아 온 목각 수탉 한 마리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날마다 내 정신을 깨우고 있다
<2007년 월간엣세이 발표>
임수련 시인 / 달팽이시인
맨발의 작은 그 사내 수련꽃 피는 칠월이면 우리에게로 온다, 시집 한 권 내밀며. 흠과 티가 없는 사내의 시집, 순백의 문장이다 푸른 잎의 길 느릿느릿 산책하는 그의 투명한 발을 닮았다 쓰다듬듯 햇살이 페이지를 넘겨야 환히 읽어낼 수 있는 작품 바람도 파르르 떨며 낭송하는 순결한 문체를 우리는 칠월이 피고 질 때까지 항아리처럼 꽃그림자처럼 푸른 이파리처럼 젖은 채 읽어낸다 해마다 시집 꽃송이 들고 나왔다가 가을이 오면 줄기과 잎, 제가 왔던 길을 모두 거두고 캄캄한 독락당으로 돌아가는 그 사내가 수련뿌리 속에 산다는 걸 지지난해 수생식물원 해설사가 자세히 알려주어 알았다 긴 겨울밤 그 적막한 독락당에 귀 기울여보면 사각사각 연필 깎는 소리 파지 던지며 흐느끼는 소리 항아리 안에서 파문을 일으키고 바람타고 항아리 안을 거니는 달빛을 일렁이고 내 마음 바다에 해일을 일으키는,
해마다 수련이 피워내는 한송이 꽃을 달팽이시인의 시집! 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가족은 달팽이시인의 건강을 기도하는 오래된 독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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