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선 시인 / 정물은 정물이 아닌 채로
비 오는 날 애인보다 차를 생각하며 가슴 철렁이게 될 줄은 몰랐다 잠을 자다 빗소리를 들었을 때 문득, 엔진에 묻은 물기들이 일제히 내 안으로 척척 들어서는 것이었다 큰비가 내리는 날에는 심장이 녹슨다거나 발바닥까지 뚝뚝 흘러내리는 물기를 닦을 수 없어 아침이 올 때까지 비를 맞았다 그림자가 생기는 쪽으로 사과는 굴러갔지만 우리가 그리는 그림엔 붉은 과즙이 없다 이별을 할 때 누가 나를 바라보는지 그 경계는 어디서 오는지 시간은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정물은 정물인 채로 누구에게도 젖어야 할 때가 온다 생각을 허공에 두고 정물은 정물이 아닌 채로
김효선 시인 / 습지의 기억
오랫동안 말을 참았다 눈부신 날들을 집어넣었다 모르고 내딛은 하나의 심장 평생 절박(切迫)을 끼고 산다 물 밖의 심장들 점점 가벼워지는 것이 죽음이라고 말하는, 풀잎은 언제나 아슬한 영혼을 품는다 한번 들어가면 평생 빠져나올 수 없는 고통의 내부는 환희로 가득하다 두통으로 휑궈낸 마침표 없는 문장들, 깊어질수록 가을은 녹아내린 햇살에 눈을 찔리고 약속이라는 긴 거짓말 끝에 갈대의 시간은 가을로 피어난다 흰 머리칼 쓸어 넘기는, 검은 물빛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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