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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효선 시인 / 정물은 정물이 아닌 채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6.

김효선 시인 / 정물은 정물이 아닌 채로

 

 

비 오는 날

애인보다 차를 생각하며

가슴 철렁이게 될 줄은 몰랐다

잠을 자다 빗소리를 들었을 때

문득,

엔진에 묻은 물기들이 일제히 내 안으로

척척 들어서는 것이었다

큰비가 내리는 날에는

심장이 녹슨다거나

발바닥까지 뚝뚝 흘러내리는 물기를

닦을 수 없어 아침이 올 때까지

비를 맞았다

그림자가 생기는 쪽으로 사과는 굴러갔지만

우리가 그리는 그림엔 붉은 과즙이 없다

이별을 할 때 누가 나를 바라보는지

그 경계는 어디서 오는지

시간은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정물은 정물인 채로

누구에게도 젖어야 할 때가 온다

생각을 허공에 두고

정물은 정물이 아닌 채로

 

 


 

 

김효선 시인 / 습지의 기억

 

 

오랫동안 말을 참았다

눈부신 날들을 집어넣었다

모르고 내딛은 하나의 심장

평생 절박(切迫)을 끼고 산다

물 밖의 심장들 점점 가벼워지는 것이

죽음이라고 말하는,

풀잎은 언제나 아슬한 영혼을 품는다

한번 들어가면 평생 빠져나올 수 없는

고통의 내부는 환희로 가득하다

두통으로 휑궈낸 마침표 없는 문장들,

깊어질수록 가을은

녹아내린 햇살에 눈을 찔리고

약속이라는 긴 거짓말 끝에

갈대의 시간은 가을로 피어난다

흰 머리칼 쓸어 넘기는, 검은

물빛의 계절이다

 

 


 

김효선 시인

1972년 제주 모슬포 출생. 2004년 계간 《리토피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2008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우수교양도서),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가 있음. 다층문학동인, 빈터 동인. KBS 제주방송국 편성제작국 작가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