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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하라 시인 / 사글세, 사 글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6.

전하라 시인 / 사글세, 사 글세

 

 

집에 들어가는 길목 언저리

할머니 한 분

쑥 한 움큼, 미나리 한 움큼, 달래 조금

좌판을 펼쳤다

 

사, 글세

더 준다니께

 

오늘은 두 번이나 어긴 사글세 내는 날

이리저리 억지로 아귀를 마친 나는

주인의 억지가 너무 쟁쟁해

사라고 발목을 잡는 할머니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 전하라 시집 <발가락 옹이>

 

 


 

 

전하라 시인 / 구름모자 가게

 

 

동대입구역 6번 출구로 시월의 가을이 나간다

팔각정에 가을손님들이 우수수 미소를 건네고 있다

바람을 밀치며 올라가는 계단마다

붉은 입술 내밀며 가을에 탄원서를 내고 있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그녀를 향해

몰려든 수많은 인파들이 그녀를 찾기 위해

서둘러 하늘빛을 퍼뜨리며 산을 오른다

숲으로 푸드덕 낙엽새들이 날아든다

 

남산을 끼고 돌아

단풍맞이 웃음소리 정겹게 계단으로 내려간다

하나 둘 포즈를 취하는 화살나무들

서넛이 모여드는 캐나다 단풍들이 붉은 웃음 띄운다

가을 앞에서는 모두 사랑의 자물쇠를 채워야만 한다

가을 앞에서는 모두 열일곱 갑장

어깨동무하는 갑장들이 산새들을 불러모은다

 

전하라 시인의 『구름모자 가게』 문학공원 시선 114

 

 


 

 

전하라 시인 / 고양이

 

 

직장에 나간다는 이유로 모처럼 냉장고를 정리하다가

구석에 잔뜩 질려 웅크리고 있는 잿빛 도둑고양이 한 마리를 본다

그는 얌전히 숨어 기름진 시간들을 훔쳐 먹고 있었다

못 본 척 지나치고 싶었던 태만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너의 용기가 가상하다

무관심을 향해 곧게 뻗어 있는 길을

사뿐히 걷고 있는 너

콩자반을 숙주 삼아 피어오르는 너의 자태가

두물머리 새벽안개처럼 고귀해 보인다

 

냉장고 문을 닫고 나를 연다

내 속에는 사족의 곰팡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결국 나는 곰팡이와 시를 함께 팔고 있었다

 

 


 

전하라 시인

2012년 계간 《스토리문학》 시 등단. 계간 《수필춘추》 수필 등단. 고려대 평생교육원 시창작과정 수료. 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한국스토리문인협회 홍보이사, 은평문인협회 사무차장, 안산문인협회 회원, 안산여성문학회 회원, 문학공원 동인, 자작나무수필 동인, 계간 『스토리문학』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