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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연숙 시인 / 폭염 소묘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6.

박연숙 시인 / 폭염 소묘

 

 

너도 힘들지

나도 힘들다

 

배롱나무 꽃은

루비를 알알이

자지러지게 흘리고

밤낮으로 매미는

'폭염주의보'를 절규하며

최후의 눈물을 흘린다

죽어야 산다는 말처럼

여름잠을 청하는 잔디

가여운 안식이다

 

입추는 111무늬 폭염의상 걸치고

BTS처럼 칼 군무를 춘다

절친 처서에게도

뜨거운 문자 날리려나

사람들은 풍차처럼 여기저기

분홍 하양 검정 바람개비를 돌리고 돌려도

폭염은 불통벽창호인지라

 

너도 힘들지

나도 힘들다

 

 


 

 

박연숙 시인 / 우리 사이엔

 

 

외눈박이 거인, 그는 그러니까

반쪽은 루저,

밤은 거인의 등 쪽, 불꽃의 척추를 세운다

반쪽은 낮.

 

우리 사이엔 비늘을 달고 빛나는 만큼 커지는 창문이 있다.

 

거인의 유방에 다섯 아이들

터무니없이 서툰, 불빛이 매달려 있다.

 

지상으로 내려와 살림을 차린 뒤

별의 반짝임, 깨어진 순간의 착란,

 

그러니까 거인을

껴안은 우리 사이엔

다른 거대한 밤, 다른 낮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내 눈이 아파서 낮은 남의 나라

 

 


 

 

박연숙 시인 / 설국

 

 

 이사는 내 몸에서 눈사람을 꺼냈다고 했다. 그럼 나는 시베리아겠네 생각했다. 눈은 여름에도 내렸으므로 눈덩이나 스티로폼 조각이나 느낌은 비슷했다. 추운 밤이면 스티로폼 깔고 잠든 이도 울었으므로 나는 빙판에서 꽃다발 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생일도 겨울이었다. 미역국 한 술 후후 불어 입에 대주던 엄마의 방한용 한 말씀, 따뜻하게 살아라 입김이 피어 올랐다 양치질을 하고 올 때마다 병실의 꽃은 목이 길어져 있었다. 꽃의 고향도 북국이었다. 북국의 억양을 쓰는 간병인들은 쉼보르스카를 알고 있을까 꽃들이 고향을 떠나오던 몸짓으로 눈이 내렸다. 엄마는 쉼보르스카를 냄비받침으로 쓰면서 아베마리아 북국의 노래로 머리카락이 희어졌다 나 자신을 나로 채운 것은 무엇일까요? 폭설을 처방한 의사는 나를 설국의 여왕으로 만들어 놓았다. 흰 눈을 한 주먹 삼키고 잠 들면 깊은 눈 속에서 엄마가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잠 속으로도 아베마리아의 흰 머릿결이 출렁거렸다.

 

ㅡ쉼보르스카 「경이로움」 에서

 

 


 

박연숙 시인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2006년 《서시》를 통해 등단. 현재 계간 <서시>의 편집장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