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원 시인 / 좌우 연대기
나사들은 늘 오른쪽을 고집했다
밥상의 다리들이 삐거덕거릴 때도 화장실 문들 손잡이가 헐거워질 때도 밥 받아먹으려고, 뒤끝을 해결하려고 오른쪽, 오른쪽, 옳은 쪽이라며 돌았다 (시간을 돌리는 바늘도 같은 편이었다)
구멍과 낯선 구멍이 어긋나지 않으려 면眠과 면眠이 붉어지지 않으려 나사들은 드라이버가 시키는 대로 정수리를 들이댔다
어쩌다가 나사의 관습에 반기 든 극좌파를 보았다
몇 시간째 광화문정류장 땡볕 아래 꼼짝 않고 있던 그는 온몸을 조이고 있던 나사가 모조리 빠져나간 뒤 자신을 열던 손잡이마저 내팽개쳤다
그는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그의 정수리를 폭염망치가 쨍쨍 내리박자 온몸에 뚫린 구멍으로 구멍보다 더 큰 못을, 못이 박힌 줄 모른 채 못 위에 못들을, 막혀 가는 줄 모른 채 못 위에 못들을 받았다 박힌 못들이 처음부터 그의 몸인 줄 알 때까지 받았다 그는 더는 생의 중력에 눌리지 않았다
나사의 좌우를 버리니 나사는 거대한 못이 되었다
시집 『얼음에서 새에게로』 (시산맥, 2021) 중에서
최지원 시인 / 얼음에서 새에게로
새의 기원은 얼음이었을까
불면의 새가 녹슨 굴렁쇠를 굴리는 동안 웅크린 종이는 뒤집히지 않아 종이 아래는 녹지 않고 그대로인 얼음
목련 나무에 묶인 개는 꼬리를 물고 제자리를 맴돌다 여름 한나절이 컴컴한 어제에 함몰되고
종이를 뒤집을 수 없어 새의 겨드랑이 아래, 내일이 잠들어 있다
꼬리는 풀리지 않아 주둥이를 물고 늘어지는 동그라미
시작에게 밀어 넣는 발끝은 연속의 파문으로 뫼비우스 띠를 굴리고
얼음의 기원은 새였을까
뒤집히지 않았던 의문들이 자전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갈 때
쓰러질 듯, 쓰러질 듯 비스듬히
아래를 위로 밀어 올리는 녹슨 지구
시집 『얼음에서 새에게로』 (시산맥, 2021) 중에서
최지원 시인 / 달팽이 악보
달팽이 느릿느릿, 비가 그린 오선 위 기어간다 아니다, 그건 내 생각일 뿐 태풍 한 채의 고요가 달리고 있는 거다 온몸의 진액을 회오리 속으로 데려가는 거다
기어가는, 아니 달려가는 고요가
갑갑했던 머리 꼿꼿이 세우고 불협화음의 삶을 고르고 있는 거다
비바체와 알레그로 사이를 아슬아슬 조율하며 하늘 향해 더듬이로 완성하는 교향곡 어쩌다 실족의 순간을 만난다 해도 텅 빈 악보 위를 운명처럼 기어가는 거다
천국과 지옥의 이란성쌍둥이 잉태하고 있는 젖은 나뭇잎 위의 세상이 딜레마라면 흔들릴수록 더욱 침잠하는 고요가 좋아 길 아닌 길 위에 웅덩이를 만드는 것 없는 물길 만들며 가는 거다
오늘의 고요가 손 내밀 때 아다지오 선율로 더듬는 내일로
최지원 시인 / 나비 정류장
날개 지닌 것들은 대칭의 자유를 가졌다지
흐르는 버스 사이를 빠져나와 정류장 행선지 번호판 가까이 맴돌다 하얀 몸짓으로 4차선 도로를 비행하는 나비
마음대로 골라 앉던 산중 들꽃도 피고 지는 순간은 아픔인 걸 알아 오늘은 절룩절룩 정형외과 찾아온 것일까
누군가를 무던히 사랑하기 전에 지그시 바라보는 법 먼저 익혀야 한다는 것을 날개 다친 후에 알게 된 것일까
앉을 듯도 하다가 스쳐 지나가는 겨우 앉았는가 싶으면 이내 달아나 버리는 꽃이여, 버스여
겨울 건너온 방랑 나비 배낭의 무게여 온몸 멍든 기억 쉽게 지워버린 나비여
나비는 꼿꼿한 기다림을 견디는 것뿐인데 꽃이 지나고, 버스가 지나고 길마저 지나서 정류장도 지난다는 것
길 잃고 헤매다 돌아올 나비를 위하여 꿈꾸는 도시의 모든 정류장 지붕은 흐르는 대칭의 날개여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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