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희 시인 / 쌍방과실
젓가락과 젓가락이 부딪쳤다.
평소에도 사고다발 지점인 식탁에서 약이 오를 대로 오른 고추를 한 입 베어 물곤 - 매운 독기를 품고 달려드는 당신 것을 닮았어 물론, 시작이 끝을 배신하지만 않은다면야 말이야 - 봉오리와 만개한 꽃이 구원 받았다고 생각해보 누구의 비명 소리가 더 크겠어
젓가락과 젓가락은 한 치의 양보도 없다 끝이 뾰족하고 예민했으므로 구석구석 찍어내며 씹기를 멈추지 않았다.
- 어젯밤 잠꼬대에 흘러나온 불청객은 누구야 - 나는 신발 한 짝 바꿔신었을 뿐인걸 - 평소완 달리 키스가 깊고 섬세했단 말이야 - 꽃잎에 단물이 쉼 없이 넘쳐 나더군 - 그럼 내 혀 속의 혀는 누구였을까 - 꿈속 외도는 신이 주신 축복이며 은혜로움이지 - 우린 서로의 몸을 빌려 낮선 상대의 향기를 취했던 거야
젓가락과 젓가락은 드디어 서로의 입맛을 놓고 본격적인 반격에 열을 올렸다.
- 당신 차 안에 떨어져있던 메모에 '전망 좋은 방'이라고 쓰여 있던데, 그럼 엊그제 출장지가 - 그건 ~ E.M 포스터의 소설 제목을 낙서했을 뿐이지 - 전망 좋은 방'에 투숙했던 그날을 기억해? - 누가? 내가? 당신하고? 미쳤어 - 그럼 '전망 좋은 방'에서의 전망을 안에서 밖이었어? 밖에서 안의 풍경이었어?
서른을 훌쩍 넘긴 그들의 밥투정은 이렇게 진화되고 있다.
- 주변인과 시 2010년 겨을호
정운희 시인 / 아들의 방
문은 고통 없이 잠겨 있다
가장자리부터 녹슬어가는 숨결을 품고 있는지 언젠가 제 몸이 녹의 일부가 되기까지 더 많은 악몽을 배설해야 한다
느닷없이 선반 위 유리컵이 떨어지듯이 느닷없이 손목을 긋고 욕조에 몸을 담그듯이 그곳에서 분노와 상처를 해결하고 녹을 꽃처럼 피워내 안전하게 내부로 들어가기를 강 속 같은 몽상의 방에서 피고 지기를 여러 날
얼굴에 난 상처 자국을 보았다 실금 간 유리처럼 아들은 단순하리만치 무표정했다 꽃을 해결하듯 수음을 즐기고 오래도록 잠을 청하기도 했다 잠깐 흐느끼는 음악 소리로 부풀려지기도 하는 방
문은 안으로부터 열려 있다
내부에서 피고 지는 파편들이 또다시 방의 실명을 증명하듯 제 스스로 염원해 갈망하는 것이다 방문은 고정된 액자처럼 흘러가고 녹을 잠식시킨 풍경들은 제 궤도를 벗어나 조금씩 이동한다
정운희 시인 / 아들의 여자
아들의 주머니 속 여자 잘 웃는 햄스터처럼 구르는 공깃돌처럼 때론 모란꽃처럼 깊어지는 여자
노란 원피스의 그녀가 온다. 한두 걸음 앞장 선 아들을 깃발 삼아 잡았던 손을 놓았던가 얼굴이 달아오르는 유리창 어깨를 타고 흔들리는 백 주머니 속에서 느꼈을 봉긋한 가슴 나는 떨어지는 고개를 곧추세우려 커피 잔을 들었다.
아들은 비어 있는 내 옆자리를 지나쳐 맞은편에 나란히 앉았다. 여자를 향해 조금 더 기울어져 있는 어깨 조금 더 명랑한 손가락들 알처럼 둥근 무릎 빨대를 불고 있는 구멍 속 우주처럼
아들의 주머니 속에서 눈을 뜨고 감는 여자 식사 중에도 길을 걷다가도 주머니 속 여자와 입 맞추며 혹은 만지작거리며, 깔깔거리다가 뜨거워지다가 때론 예민해지기도 하는 즐거운 방식으로 틀락거리는 곰 발바닥이 쑥쑥 자란다.
구름의 무늬는 몇 장일까? 모래가 생성되기까지의 시간은?
정운희 시인 / 수리공과 장미
초대의 형식은 아니지만 실내는 한껏 부풀어 있다.
우연히 마주친 바람처럼 우리는 서로를 모른 채 즐겁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방에 들여놓고 신발을 정리하고 거울을 닦는다. 장미는 어제보다 조금 더 향기롭다. 향기가 때론 무기 같아서 팽팽해진다.
만남은 오래된 커피와 같아서 쓴맛의 어원을 잊은 지 오래 퇴화된 혀 끝 달거나 쓴 촉감을 모르겠다.
커튼은 나비처럼 고요하고 테이블은 단단히 묶여 있다. 선뜻 들어설 수도 없는 사내의 등 뒤 숨 쉬는 찾잔이 내 손 안에 있다.
볼트와 너트를 풀어내고 조이고 여린 꽃잎을 다루듯 긴장하는 사내의 숨소리 나는 과일을 꽃처럼 깎다가 허공에 손을 씻다가 말리다가 발을 오므리다가 펴다가
볼트와 너트가 정리되자 캄캄한 동굴 속 생물이 살아나듯 수만 송이의 장미꽃이 모니터 속에서 넘쳐난다.
정운희 시인 / 유월
당신를 설명하려고 수도 없이 담장을 기어 올랐죠. 마른 몸에 이상한 기후가 찾아온 거죠 아버지 눈길조차 피하며 열지 않았던 봉오리, 아버지의 잠자리를 훔쳐 본 건 우연이었어요 호흡을 내 뱉어야 했을까요 방전된 가랑이 사이로 번개는 내리치고 확장된 눈동자는 집요하게 행위 속으로 빠져들었죠 아버지의 여자로 담장가득 아이들을 쏟아내고 있어요 모늘도 바람은 나를 발가벗기고 구석구석 닦아주었어요 작고 여린 꽃잎의 속살까지도, 발칙한 꿈을 꾸는 날이면 침을 삼킬 여유조차 없는 불안을 끌어올리며 몸을 열곤 하죠 잎잎이 묻어있는 당신의 정액을 담벼락 가득 묻혀 놓고 날마다 거친 호흡을 토해내며 다산의 축복을 노래하죠 해마다 담장을 기어모르는 부활한 꽃송이들 아버지 모늘 밤에도 당신의 달뜬 번개를 맞을 수 있을까요 달빛을 쬐며 당신의 딸이 건너다보는 빈곳으로 짐승처럼 우직한 그림자가 다시 한 번 짓누를까요 하혈하는 나를 막을 수는 없을까요.
정운희 시인 / 페이소스
구름은 싱겁고 행빛은 너무 햇빛다워서 쓸모가 없어 쓰레받기로 걷어내는 머리카락이거나 먼지 혹은 살비듬으로 처리되는 엿 같은 하루
너를 곁에 두고도 침 삼키듯 꿀꺽 삼켜야하는 모호한 흔들림 혹은 불편 모래천 인형처럼 한 곳만 바라보는 집요함 그 입술에 꼬리는 식상해 지져워 먼지를 뒤집어 쓴 플라스틱 꽃의 꼴이라니 내가 나를 파먹는 쾌감이라니
더 우려낼 것도 없는 꿈틀거리는 허벅지, 꿈틀거리는 성기,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내가 죽지 않은 것은 분명해 나란히 누운 나를 두고 한 세월 깨어나지 못하는 아둔한 사랑은 휘발된 푸른 술병으로 나뒹굴어졌으므로
설탕은 달고 유리는 차갑고 저녁은 맛있어. 달빛을 쓸어 담을 수는 없는 일 그러므로 혁명은 혁명이고 그림자는 그림자이고 옆집 개는 옆집 개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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