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용 시인 / 거품은 빛난다
1 거품의 집
거품은, 자신이 거품인 것을 알고 있을까? 거품은 부풀어 오를수록 빛난다 속이 텅 비었는데도 거품 속에는 오로지 거품 밖에 들어 있지 않은데도 마치 공중정원처럼 빛난다 구름 속을 거닐 듯이 빛난다. 그 구름의 공중정원을 거닐고 있는 동안 발목이 지워지고 무릎이 지워지고 끝내 몸뚱이마저 지워져도 사상누각은 빛난다. 찰나의 한 순간일 뿐인데도, 찰나의 한 순간이어서 더 황홀하게 빛난다
그 거품의 숲은, 늘 안개에 젖어 있다 안개는, 거품을 피어오르게 하는 살의 비누
아무런 의미 없이 떨어지는 물 한 방울은 없듯이, 거품 하나에도 존재의 미세한 떨림이 있다는 듯이 세계의 빈 공간에 채워지는, 그 백색의 음(吟)―. 스스로 자가 격리되는, 이 공복―. 사람과 사람 사이는 그만큼 멀어지고, 타인은 철저히 타인이 된다.
이 공복의 빈 공간에 채워지는, 무채색의 백색소음―, 안개, 안개의 숲은 그렇게 부풀어 오르고, 거품의 집들은 팽창한다.
그 안개의 숲에서 부풀어 오르는 집, 거품의 집들―. 마치 튤립 버블처럼 사람의 발목을 지우고 무릎을 지우고 끝내 얼굴마저 지우지만
오늘도 아름다운 튤립의 꽃처럼 피어오르는 거품, 거품들―. 공복의 빈 공간에 마치 개기월식의 금환식처럼 겹쳐지는 얼굴, 얼굴들―. 거품의 얼굴들―.
그래, 거품은 자신이 거품인 것을 알고 있을까?
거품은 부풀어 오를수록 빛난다
2 거품의 눈
그래, 거품은 하나씩의 눈을 가지고 있다
부풀어 오르는 거품마다, 하나씩의 눈을 가지고 있다
그 거품의 눈은, 늘 가시권 밖에서 빛난다
너머는, 언제나 거품의 등뼈―.
그 등뼈는, 우리들의 상상력 바깥에서 직립한다
눈 하나마다 무수한 겹눈을 가진 거품의 눈―, 그 다면체의 복안(複眼)들―.
아무런 복안(腹案)도 없이 바라보는 눈들은, 눈부시다
그 다면체의 배후에 떠오르는 세계는, 텅 비어 있으므로 더욱 빛난다
그렇게 아무런 복안(複眼), 혹은 복안(腹案)도 없이 바라보는 무채색의 눈들에게
자연사 박물관의 거대한 철골 구조물로 조립된 공룡의 뼈처럼 부풀어 오른 거품은, 오늘도 속삭인다
너도 거품이지?
거품의 눈이지?
3 버블 튤립
버블 튤립은, 존재의 거품 현상―.
사람의 몸이 하나의 물질이었을 때 거기, 피어오르던 거품은 인간 최초의 생존 욕구, 동굴 속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사냥해온 동물의 살을 뜯으면서도, 그 뼈로, 동굴의 벽에 희생된 동물의 형상을 새김으로서, 그 동물들의 영혼을 위무했다. 이것이 희생제의―, 인류 최초의 아름다운 버블 튤립―. 보이지 않는 이 거품의 꽃은, 이렇게 타자를 끌어안음으로서 아름다운 하나의 꽃의 실체를 얻었다
버블 튤립은, 그 공기의 꽃―.
잎과 뿌리는 보이지 않는 공기로 이루어져 있지만 호흡할 때마다 숨결처럼 맥박처럼 스며들던, 꽃―.
심장 깊숙이 뿌리박힌, 비록 빛깔도 형태도 없지만
그렇게 맑고 투명한 공기의 숨결로 피어오르던, 꽃―.
계간 『시와 경계 』 2021년 여름호 발표
김신용 시인 / 못
못이 구멍 속에서 곧 빠져나올 듯 헐렁이고 있다
낡은 판자벽의 못,
못의 구멍 속에도 초대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늙은 시간들이 있었는지, 그렇게 시간의 풍화작용에 닳아가며 생의, 거품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는지 못은, 이 구멍이 내가 몸담았던 곳이 맞을까? 의아해하듯 빠져나오려다가 도로 들어가곤 한다
뿌리 깊은 나무라고 생각했는데, 암반도 휘감으며 땅속 깊이 박힌 뿌리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어이없이 흔들리다니! 덜컹이다니!
바람이 불 때마다 곧 튀어나올 듯 덜컹이는 것이 무슨 감옥의 문이 열린 듯 그 무기(無期)의 시간에서 비로소 자유를 얻은 듯도 하지만
못은, 도무지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 표정이다
오랜 세월, 헐거워진 구멍 속에서 뼈마디마디 닳아가고 있으면서도 빠져나오지 않으려고 온몸으로 웅크리고 있는 것 같다
그래, 살아온 날들이 눈에 가시처럼 돋아 있어도, 그 시간이 가슴에 돌의 알을 낳아도 내가 빠지면 벌어진 틈새로 바람이 스며들어 아이들의 손발이 차가울 것인데, 웅크린 생활의 무릎이 더 시려올 것인데
못은, 그런 걱정으로 구멍 속을 기어코 버티고 있는 것 같다
바람이 불 때마다 너무 오래 덜컹거려 헐거워진 구멍 속으로 빗물이라도 스며들면 녹슨 관절이 더 삐걱거릴 것인데, 그렇게 녹슬어 가는 몸의 구석구석 암갈색의 녹은 마치 암세포처럼 더 빠르게 퍼져 흐를 것인데,
그래도 못은 헐거워진 구멍 속을 한사코 웅크리고 있는 것 같다
그 아픈 시간들이 지금은 눈의 비문(飛蚊)처럼 돋아 있어도, 못의 구멍 속에도 꽃이 피고 구름이 흐르고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
못은, 바람에 덜컹일 때 마다 빠져나오지 않으려고 혼신으로, 구멍 속을 움켜쥐고 있는 것 같다
그 생이, 마치 쥐라기의 늙은 황혼처럼 구부정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어도…
계간 『시와 경계 』 2021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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