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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여성민 시인 / 루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7.

여성민 시인 / 루터

 

 

비는 샐러드처럼 와요

하고 말하면 어떤 사람은 비에 집중하고 어떤 사람은 샐러드에 주목하지만

비는 어떻게든 오거든요 샐러드처럼 오거든요

피망과 파프리카의 차이점을 모르는데도 와요 이상하지 않아요? 기다려도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마음은 좋은 사람 같아요

물에 녹을 것 같아요

 

사랑이 물에 녹을까요

 

녹는다면 오래오래 입맞춤하겠습니다

정말 녹는다면 물고기를 잘못 샀군 하고 말하겠습니다 사랑이라면

사랑이라면 사랑이 최후의 5분이라면 95분의 물고기라면 그리하여 100분 드라마라면

입술이라는

 

물고기를 물고

물고기를 교환하고

 

튀김 소리에 비유하겠습니다 입술과 입술이 닿으면 종교처럼 고독해서요 이별이 종교적입니다

 

악에서 구하니까요

 

그리고 사실은 이렇습니다

인류의 90%는 이별한 사람입니다 10%는 이별할 사람이구요

이별한 인류와 접촉해 이별하는 문명을 받아들인 사람이 서고에서 책을 분류하고 식빵을 굽고 식자공으로 취업하고 설교하고 갓 볶은 커피를 짜서

 

세상은 아직 선선하고

 

우리가 불에 탄 채로 거리를 달리며 긴 장마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계간 『시와 사람』 2020년 가을호 발표

 

 


 

 

여성민 시인 / 잠

 

 

이런 잠 어때요 여섯 개씩 포장이 가능한 잠

입구를 금색 띠로 묶어서 천사가 한 봉지씩 수거해 가는 잠

 

식빵 같은 잠

왜 잠의 끝이 딱딱하냐고

 

부드러운 부분이 우리의 시간일까요 우유 없이도 인간의 시간을 부드럽게 할 수 있나요 30년 40년 잠이라는 우유에 적신 인간의 등을 사랑했지만

 

내 잠은 욥과 같아요

 

아내를 잠에 유기합니다

딸의 시신들은 흰 우유 속에 있습니다

 

이런 잠 우유 통에 서로를 밀어 넣는 잠 최소 20년은 우유에 몸 담근 연인하고만

사랑을 나누는 잠

부드럽게 해 줘요 이 말이 청혼인 민주공화국에서

그러니까 이런 유리병 어때요 평생의 빛이 들어있는 유리병

신의 형상으로

총알처럼 박아놓은 유리병

그것이 잠이야 인간의 잠을 수거하러 지상에 내려왔던 천사가 딱 한 번 말했던 유리병에서 부패한 잠이 흘러나와

 

밤은 검은데

한 가운데 흰 우유를 붓듯

아름답고

 

유리병처럼

유리병처럼

 

잠이 인간의 등을 닦아줍니다 유리병처럼

 

계간 『애지』 2021년 겨울호 발표

 

 


 

여성민 시인

충남 서천에서 출생. 안양대학교 신학과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2010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에 소설이 당선되어 등단. 201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저서로는 시집으로 『에로틱한 찰리』(문학동네, 2015)와 구약 내러티브를 해석한 책 『돋보기로 보는 룻기』와 『꼭꼭 씹어 먹는 사사기』가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