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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병숙 시인 / 저녁으로의 산책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7.

정병숙 시인 / 저녁으로의 산책

 

 

저녁은 너무 일찍 찾아들었다.

길 나선 달빛보다 먼저 옷 갈아입고

야생의 영혼들 마른 옷깃 흔드니

갱년기 앓던 민들레의 봄꿈이

홀씨처럼 피어난다.

 

남몰래 아픈 이들 저녁은 길다.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나무에서 나무로

얼었던 내 혈관을 타고 흘러

말랐던 감각의 관다발을 흔든다.

 

살아야겠다 다짐하는 안개 바람 속

도둑고양이 한 마리 쓰레기 뒤적이고

전선 없는 전봇대에 바람이 매달린다.

늦은 귀가를 서두르는 자동차의 행렬

꼬리가 길다.

 

나는 나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

 

 


 

 

정병숙 시인 / 오랜된 골목

 

 

낯선 햇살이 내 등을 어루만진다 추위에 떨고 있는 골목 다정히 웃던 기억들 사라지고 흔적만 남는다 골목이 사라진 뒤 길이 길을 잃고 혼자서 궁시렁거린다 전에 골목이었던 자리 아직도 누군가 서성인다.

 

나이 먹은 골목 해창 고샅길에서 공공 앓고 있다.

 

 


 

 

정병숙 시인 / 오월의 청량리

 

 

전봇대에 기대선 오후 한나절

태양도 기울어 가고

수양버들 번식 위한 화분

아무렇게나 쏟아져 내려

초겨울의 눈발처럼 흩날리고 있다.

 

다색초 계곡에서 전해올

엘레오노라* 소식 마중하러

떠나는 기차

끝없이 뭍으로 뻗은 철로의 평행

거슬러 올 침묵

먼지 낀 플랫폼

 

스스러움에 젖은 역

허기진 비둘기떼에 둘러싸여

밤새 유량의 몸 지켜 주었다.

 

철로에 매단 주검

다색초 계곡에 묻고

바깥세상에 옮길 또 다른 그리움이

그녀는 슬펐을까

 

엘레오노라 발아래 엎드린 약속

허영과 난폭의 물살 속으로 돌아왔다.

비리고 습기 찬 골목 귀퉁이

오월의 청량리에서

그 여인 다시 찾을 것인가

 

 


 

 

정병숙 시인 / 불온한 3월

 

 

봇물이 터지기 시작했다.

민들레 자궁도 열리기 전 일란성 쌍둥이를

난간에 낳았다 제비꽃도 몸을 풀었다.

초경이 시작된 홍매화 몸까지 붉고

곁에 자리한 매실과 벚꽃들

앞다퉈 산고를 겪는다.

 

오랜 갈대숲에서 풍비박산 난 새 집이 있고

잡풀은 고스란히

어린 새들 에게 보금자리를 내어준다.

갈대숲은 따뜻하다.

 

불온한 3월

나는 여전히 춥다.

 

 


 

정병숙 시인

전남 순천 출생. 단국대학교 한국어문학과 졸업. 호서대학교 문화복지상담대학원 문화콘텐츠창작학과 석사. 동 대학원 한중문화콘텐츠학과 박사. 2003년 <정신과 표현>으로 등단. 현 호서대학교 강사로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