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숙 시인 / 저녁으로의 산책
저녁은 너무 일찍 찾아들었다. 길 나선 달빛보다 먼저 옷 갈아입고 야생의 영혼들 마른 옷깃 흔드니 갱년기 앓던 민들레의 봄꿈이 홀씨처럼 피어난다.
남몰래 아픈 이들 저녁은 길다.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나무에서 나무로 얼었던 내 혈관을 타고 흘러 말랐던 감각의 관다발을 흔든다.
살아야겠다 다짐하는 안개 바람 속 도둑고양이 한 마리 쓰레기 뒤적이고 전선 없는 전봇대에 바람이 매달린다. 늦은 귀가를 서두르는 자동차의 행렬 꼬리가 길다.
나는 나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
정병숙 시인 / 오랜된 골목
낯선 햇살이 내 등을 어루만진다 추위에 떨고 있는 골목 다정히 웃던 기억들 사라지고 흔적만 남는다 골목이 사라진 뒤 길이 길을 잃고 혼자서 궁시렁거린다 전에 골목이었던 자리 아직도 누군가 서성인다.
나이 먹은 골목 해창 고샅길에서 공공 앓고 있다.
정병숙 시인 / 오월의 청량리
전봇대에 기대선 오후 한나절 태양도 기울어 가고 수양버들 번식 위한 화분 아무렇게나 쏟아져 내려 초겨울의 눈발처럼 흩날리고 있다.
다색초 계곡에서 전해올 엘레오노라* 소식 마중하러 떠나는 기차 끝없이 뭍으로 뻗은 철로의 평행 거슬러 올 침묵 먼지 낀 플랫폼
스스러움에 젖은 역 허기진 비둘기떼에 둘러싸여 밤새 유량의 몸 지켜 주었다.
철로에 매단 주검 다색초 계곡에 묻고 바깥세상에 옮길 또 다른 그리움이 그녀는 슬펐을까
엘레오노라 발아래 엎드린 약속 허영과 난폭의 물살 속으로 돌아왔다. 비리고 습기 찬 골목 귀퉁이 오월의 청량리에서 그 여인 다시 찾을 것인가
정병숙 시인 / 불온한 3월
봇물이 터지기 시작했다. 민들레 자궁도 열리기 전 일란성 쌍둥이를 난간에 낳았다 제비꽃도 몸을 풀었다. 초경이 시작된 홍매화 몸까지 붉고 곁에 자리한 매실과 벚꽃들 앞다퉈 산고를 겪는다.
오랜 갈대숲에서 풍비박산 난 새 집이 있고 잡풀은 고스란히 어린 새들 에게 보금자리를 내어준다. 갈대숲은 따뜻하다.
불온한 3월 나는 여전히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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