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욱 시인 / 구운몽, 그 꿈에 대한 유폐의 詩 - 김만중 아홉 개의 꿈
꿈인가 싶어 깨어 보니 노도에 눈 내린다. 태속 같이 보드라운 눈밭 얼굴을 파묻으면 주름살 깊은 어머니 내 눈가에 선명하다.
먼 길 노 젓다 돌아오는 쪽배인 양 그리움 몰아치다 파도 위로 사라지면 갯바위 조가비처럼 적셔드는 흰 적설積雪
이른 새벽 깨어나 필묵筆墨들어 시를 쓴다. 사록史錄은 등불 속에 시절 없이 흔들리고 뇌리에 지난 생들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돌아보면 내게 있어 한갓 생生은 꿈이었네 말 잃고 벼슬 잃은 유폐의 날들을 생각하니 금강경 한줄 공空처럼 내 무심에 젖어든다.
인간사 부질없음을 단 하룻밤에 깨달아 눈 감은 눈 감은 듯 써 내려간 일필휘지一筆揮之여 내 미처 어찌 몰랐을까 이생이 한갓 꿈임을
산마루에 앉아서 먼 바다를 바라보니 힌 눈은 내려 앉아 백발의 내 몸을 덮고 손에 든 서책에 쌓이는 왕조王祖의 시름이여
희빈의 치마폭 왕 그 또한 내 님이거늘 오교에서 기울던 술잔 지금도 생각나네 님 계신 그곳을 떠나 홀로 달랜 사년巳年이여
반생을 살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네 노도에 맺힌 한恨이 한 생각에 풀어지고 그대가 품고 있던 경오 또한 모두 꿈인 것을
찢어진 가즘 씻고 나니 이곳이 어디인가 통한은 마르다 못해 한지漢紙에 스며들고 이 한몸 망부석 되어 만리 서포西浦를 지키네
자나 깨나 품속에 금강경을 품었더니 내가 겪은 세상이 아홉 개의 허공이었네 손들어 잡아보아도 그냥 그저 구름이었네.
《정형시학》 2020. 겨울호
정성욱 시인 / 반송 가는 길
그대의 벽지 반송리로 가는 막차는 아직 남아 있다. 그대에게 가는 길의 오직 한길인 석대동 길목 잎 진 겨울나무 아래 가문비 가문 그리움에 젖어 기다린다 아내는 아직 우산을 들고 서 있을까 이미 때를 놓친 많은 시간들이 조방창의 먼 불빛으로 반짝이고 시가 될 수 없는 일련의 생각들이 마음을 붙든다 외롭지 않다 내가 버린 팔 할의 희망이 다시 솟아오르고 도로변을 달려가는 철마산의 무거운 산 그림자도 발목을 붙든다 누가 알기나 하리 반송, 기장, 철마 아름다운 마을들의 이름들이 길과 길의 끝에 서 있고 단 한 번에 날려버릴 조방창의 폭약들이 다 터진다 해도 한발자욱도 벗어날 수 없는 그리움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나의 희망인 반송리로 가는 막차는 아직 남아 있고 고단한 퇴근길의 저녁은 늘 이곳에서 부드러운 바람이 되었다.
[1992년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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