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인 시인 / 비망의 다른 형식
모니카,
내 안의 푸른 광물과 아득한 기체로 사는 사람 치통의 반란 같은 통증으로 당신이 온다
고백은 홀로 타오르는 말
작정 없는 열망으로 질주하던 밤, 잠들어서도 되놰 부르던 이름이 큰물처럼 불어나 잠의 둑을 무너뜨리고 범람했었다
사랑이 종을 흔들며 방문 앞을 지나 뒷등을 보이며 복도를 돌아갈 때 나는 빈 복도로 나가 방금 나를 관통하고 지나간 운명의 맨발, 갈라터진 뒤꿈치를 보았다
어느 봄날, 당신은 흰 수도복 속에서 영역이 다른 사람으로 웃고 있었지 당신은 아침식사 때 접시 밑 메모지에 적힌 임지任地대로 간략하게 짐을 챙겨야 하는 사람
당신의 임지는 어디일까, 밤의 검은 창문들아 말해다오 나는 위급했으나 당신은 창유리 속에서만 목을 젖히고 눈부시게 웃는 사람
투명해서 아픈 날엔 유리창에 당신의 맑은 콧날을 그렸다 작은 한숨을
당신 둘레에서 흰 빛을 조금 가져다가 화분에 묻고 꽃을 기다리던 나는, 빙하의 사계를 건너는 사람 화분에는 쇠락이 우거져 모노드라마 일인배우처럼 서있는 나무 한 그루 마른 잎사귀 몇 흘려두고 빈손을 내려다보는 불임의 나무
계절이 폭설을 몰고 지나가는 어느 해거름 나의 오렌지나무 흰 불꽃에 에워싸이네, 시간의 은빛이 왁자하게 불붙어 날개를 퍼덕이네, 사라진 가슴 사라진 자궁에 어떤 통점 하나가 깊숙이 착상된 것일까
보이지 않는 것들의 향기가 끼쳐오는 날 시간의 연약지반을 뚫고 희끗한 반백의 당신이 온다, 나의 모니카
월간 『현대시학』 2016년 7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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