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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수림 시인 / 그 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7.

조수림 시인 / 그 후

 

 

 남자가 길어졌다 뒤늦게 눈치챈 장례지도사가 남자의 무릎을 꺾어 목관 안에 몸을 우겨 넣었다 무릎이 솟아올라 관 뚜껑이 덮이지 않았다 뚜껑에 대못을 치려는지 무릎을 부수려 는지 망치를 집어 든 순간 서슬 시퍼런 큰아들이 멱살을 움켜 잡았다 새파랗게 수염을 민 둘째가 튀어 올라 옆구리에 일격을 가했다 넘어지려는 순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막내가 예의 바르게 쌍욕을 한 방 날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죽어서 자라는 몸 죽음 이후 거인이 되는 자가 있다 한평생 별 볼 일 없던 자들이 그랬다 응축된 분노가 사후경직 과정에서 일으킨 빅뱅 뼈를 자라게 했다. 거인을 본 것은 혼자만이 아니다 모두들 죽은 남자의 모습에 압도되어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난생 처음 아버지가 위대해 보였다고 큰아들이 울먹이며 말했다. 관을 작게 준비해온 장례지도사의 터무니없는 실수도 어쨌거나 내일 이면 모든 게 한줌의 재로 사그라질 것이니 모두가 참아 주기로 했다.

 

『시인수첩』 2015-가을호 신작시 > 에서

 

 


 

 

조수림 시인 / 토(吐)한 사과

 

 

사과가 뿌리에게 진액을 빨린다.

핏기가 가져 파리해진 사과가

쪼그라들고 오그라들고,

쥐어짠 마지막 한 방울.

사과가 뿌리로 흡수된다.

 

뿌리 끝에서 진액이 팡팡 터질 때

늙은 흙이 젊어진다.

봄비에 흘러온 하얀 종이꽃,

바람 타고 가지 끝에 올라앉을 때

'축제다'.

 

 


 

조수림 시인

1967년 서울에서 출생.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0년 《시와 반시》 신인상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