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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미승 시인 / 거미를 사유하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7.

김미승 시인 / 거미를 사유하다

-패턴에 대하여

 

 

1

'어울림'이란 이름을 단 아파트 앞에서

나는 왜 거미를 떠올렸을까

총,총,총, 하늘을 겨누고 선 아파트

허구헌날 똑같은 구조 안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먹이를 사냥하는

아하, 저 곳은 거미들이 사는 집

몸 안에 내장된 기억을 짜내어

수많은 각각의 방을 만든 거미는

평생 단 한 채의 집도 짓지 못하고

야금야금 제 몸을 뜯어먹으며 살아간다

같은 패턴의 비밀 키를 공유하며

짐짓 생경한 정글의 법칙을 사는 양

어울려 산다

 

2

거미가 짜 놓은 해먹 위에

루소의 '잠자는 집시'여인을 가만히 뉘어본다

만돌린을 곁에 두고 사막에서 노숙을 즐겨하는

맨발의 집시 여인과

한 발짝도 제 집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는

완곡한 거미남자가 사랑을 한다면

아찔한 천지간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면

이상한 나라의

이 낯선 조합이 설명되는 것일까

 

 


 

 

김미승 시인 / 초록을 위한 파반느

 

 

창밖 느티나무에 와작와작 초록 불이 켜진다

멀리서, 얼었던 강이 소리치며 깨어나는 소리

뿌리가 뿌리를 찾아

물 건너오는 소리

 

초록은 세상에서 가장 아픈 빛깔

살과 피와 뼈를 다 태워야만 얻을 수 있는

결기의 색

 

초록에 감전된

느티나무가 열 세 발자국을 뗀다

전설처럼,

겹겹이 하얀 정신을 껴입고

시베리아 동토의 자작나무 숲이 된 그녀*

생을 다해 걸어간 아무르의 열 세 발자국

그 초록혁명을 보네

 

구름, 신발, 의자, 고지서 그리고 시와

와작와작……

나의 절망이 깨어나는 소리

 

느티나무의 시큰한 발목에 얹히는 오후의 햇살

지지직, 노선을 우회하며 휘어지는 가지

길이 없는,

허공에 길을 내고 있다

 

*일제강점기 연해주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여성사회주의자이며 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라. 1918년 33세에 러시아 하바롭스크 아무르강가에서 총살당했다. 죽기 직전 그녀가 걸었던 열 세 발자국은 조선13도의 독립을 의미했다고 한다.

 

 


 

김미승 시인

전남 강진에서 출생. 광주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9년 계간 《작가세계》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  『네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익어 가는 시간이 환하다』 와 청소년소설 『세상에 없는 아이』, 『저고리 시스터즈』, 『검정 치마 마트료시카』 동화 『잊혀진 신들을 찾아서, 산해경』, 『상괭이와 함께 떠나는 다도해 여행』, 『서방바위와 각시바위』, 『소곤소곤 설화모리』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