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승 시인 / 거미를 사유하다 -패턴에 대하여
1 '어울림'이란 이름을 단 아파트 앞에서 나는 왜 거미를 떠올렸을까 총,총,총, 하늘을 겨누고 선 아파트 허구헌날 똑같은 구조 안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먹이를 사냥하는 아하, 저 곳은 거미들이 사는 집 몸 안에 내장된 기억을 짜내어 수많은 각각의 방을 만든 거미는 평생 단 한 채의 집도 짓지 못하고 야금야금 제 몸을 뜯어먹으며 살아간다 같은 패턴의 비밀 키를 공유하며 짐짓 생경한 정글의 법칙을 사는 양 어울려 산다
2 거미가 짜 놓은 해먹 위에 루소의 '잠자는 집시'여인을 가만히 뉘어본다 만돌린을 곁에 두고 사막에서 노숙을 즐겨하는 맨발의 집시 여인과 한 발짝도 제 집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는 완곡한 거미남자가 사랑을 한다면 아찔한 천지간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면 이상한 나라의 이 낯선 조합이 설명되는 것일까
김미승 시인 / 초록을 위한 파반느
창밖 느티나무에 와작와작 초록 불이 켜진다 멀리서, 얼었던 강이 소리치며 깨어나는 소리 뿌리가 뿌리를 찾아 물 건너오는 소리
초록은 세상에서 가장 아픈 빛깔 살과 피와 뼈를 다 태워야만 얻을 수 있는 결기의 색
초록에 감전된 느티나무가 열 세 발자국을 뗀다 전설처럼, 겹겹이 하얀 정신을 껴입고 시베리아 동토의 자작나무 숲이 된 그녀* 생을 다해 걸어간 아무르의 열 세 발자국 그 초록혁명을 보네
구름, 신발, 의자, 고지서 그리고 시와 와작와작…… 나의 절망이 깨어나는 소리
느티나무의 시큰한 발목에 얹히는 오후의 햇살 지지직, 노선을 우회하며 휘어지는 가지 길이 없는, 허공에 길을 내고 있다
*일제강점기 연해주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여성사회주의자이며 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라. 1918년 33세에 러시아 하바롭스크 아무르강가에서 총살당했다. 죽기 직전 그녀가 걸었던 열 세 발자국은 조선13도의 독립을 의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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