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민 시인 / 그늘의 노년(老年)
그늘은 평생 동안 자신을 벗어난 적이 없다. 누구를 위해서 무엇이 되겠다는 버거운 마음도 애초에 없었다
누군가 그늘의 넓이를 탓하며 허벅지를 발로 차기도 했지만 누군가 그늘의 깊이를 탓하며 말뚝을 박기도 했지만 그는 삶이 원래 그러하다고만 생각했다.
세상이 던진 수십 쌈의 바늘 같은 말을 듣고 집에 와서 누운 날
우우우 우우우 그늘이 자신의 몸을 필사적으로 비틀며 한 두어 시간, 크게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침이면 그는 또 잘 마른 햇빛 한 장을 누군가에게 내민 채 마당 끝에서 골똘히 혼자 깊어만 가고 있었다.
박승민, 『슬픔을 말리다』, 실천문학사 , 2016년
박승민 시인 / 미루나무의 겨울 순례
뼈다귀 몰골로 풍(風), 맞으며 대들면서 끝내 자기 생(生)의 흰 별을 찾아가는, 저 허공에 눈이 먼
박승민 시인 / 마지막 힘
고구마를 걷어낸 밭에 상강 서리가 내리던 날 늙고 썩어 버려두었던 사과나무에 활짝, 하얀 꽃이 피었다
삼년 내내 풍으로 앓아 누운 주영광씨, 저녁나절 번쩍 눈떠 마누라 한번 쓱 보더니 "사과밭에 물!" 한마디 남기고 세상을 떴다
그 한마디 결구를 맺느라 혼자서 무던히도 아프고 눈감지 못했던 것이다
- 《끝은 끝으로 이어진》(창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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