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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수우 시인 / 흔들의자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22.

김수우 시인 / 흔들의자

 

 

돌아가자마자 흔들의자부터 사야지

 

언제든 앉으면 저절로 몸이 흔들리는 의자

달개비 같이 서러워도 한순간 심연처럼 깊어지는 의자

거미줄처럼 복잡해도 단박에 고요해지는 거야

 

쿠바는 흔들의자였다

집집마다 계단 같은 흔들의자가 있다

열 개씩 가진 자, 그 뒷길

칠 벗겨진 가난한 문가에도 두개씩은 놓였다

튼튼한 것도 있고 삐걱이는 것도 있지만

튼튼한 것도 있고 삐걱이는 것도 잇지만

모든 틈들이 거기 앉아 흔들거렸다

부러웠다

의자에서 춤과 노래 흔들흔들 자랐구나

의자 가득 하느님들이 술렁이는구나

하느님은 춤을 추는 자, 흔들의자는 야릇한 신을 기르는구나

 

한번도 제대로 흔들리지 못했다

바다를 입은 파도처럼 산그늘 입은 후박나무처럼

흔들, 흔들거리자

죽음도 삶도 모두 춤이어야 하니

 

죽은 자도 산 자도 출렁이는 바람이어야 하니

 

십년을 돌고 돌면서

아직도 사지 못했다

 

낡은 제단에서 태어난

하느님들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김수우 시인 / 알타미라의 소

 

 

1

 

고대이집트에서 나는 창조신 누트였고 길고 짧은 신화를 수없이 건넜으며 인도에선 지금도 성자이다 이중섭에겐 큰 눈을 가진 식구였으며 알타미라 동굴에서 매일 지축 울리고 오늘도 허공 넘는 尋牛인데

 

2

 

냉이꽃 듬성한 다리 밑

액체질소통 -196°C로 동결된 수소 정액이 거래된다 전기자극으로 뽑아낸 정액을 분양받은 인공수정사들, 바람든 암소를 안는다 수태시킨다 산도 바다도 애비 없는 단백질덩이로 태어난다 채권과 채무로 절룩거리는 流轉, 일상은 신상품과 재고로만 유통된다 下水에 무심히 젖는 봄

 

신은 이제 번식 관리되는 중이니

신화도 식구도 허공 키우는 날빛도 배합사료일 뿐이니

 

3

 

뼈와 살을 뜯어 먹이는 일 가죽구두를 신기는 일 그저 하염없었거늘 향기로운 제사였거늘 내 눈이 수평선이었거늘 수평선 너머 네 아침이었거늘

너희가 냉이꽃보다 쓸쓸한 이유를 안다

까닭없이 제 살 물어뜯는 이유를 안다

 

이 영악한 슬픔들아, 영원한 허깨비들아

 

 


 

 

김수우 시인 / 굴절의 전통

 

 

입석으로 타서 간이의자를 하나 잡았다 다행이다

 

매화가 번진다 그리운 이가 먼데 있다고 한다 다행이다

 

지난 겨울 철탑으로 올라간 사람들은 어찌 되었을까

 

다행과 다행 사이 다행스럽지 못한 것들이 꽃대처럼 칼금처럼 불면처럼 직립한다

밥그릇 안에서 굴절되는 영혼처럼 눈물은 봄비로 굴절되었다

 

성냥갑만한 메아리도 없이 봄비는 다시 철탑으로 굴절된다

 

내가 가려는 바다는 통로 천장에서 거물거물 떨고 있다

 

팬티까지 벗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다가 양말 벗을 때의 수치를

 

정직이라 부르는

 

네 칼날도 꽃으로 굴절될 것인가 분노란 그따위 궁리이다

 

오늘도 손해를 본 토마토수레는 굴절되지 않는다 다행이다 아니다

 

젖을 빨던 질문들은 철탑으로 굴절되었다 다행이다 아니다

 

햇빛을 탕진하는 붉은 동백, 아슬아슬하다

 

신호등 앞에 늙은 외투처럼 서 있는 하늘, 뒤뚱거린다

 

간이의자를 접는다

 

 


 

 

김수우 시인 / 몰락을 읽다

 

 

구름이던 큰 나무에 구름이던 작은 새들이 앉아 있다

이 책 저 책을 뒤적인다 아무 할 일이 없다 씹었다가 뱉고 뱉었다 씹는 하느님

 

담벼락에 걸터앉은 젊은 햇빛이 말을 건다

난 여섯 살 소꿉동무였어 얼굴 잊은, 탱자 울타리에서 불러대던 옥희라는 이름이 간질간질 돋아난다

 

나무는 무수한 몰락으로 자란다 고대 신화가 몰락의 힘으로 살아가듯

 

풀꽃과 어깨동무하고 한참 절룩이는데 뒤통수 닮은 진실들이 옆에서 걷고 있다

 

뚜벅뚜벅 걸어온 나무그늘이 어깨를 겯는다

어깨에 작은 새들이 논다 나도 어깨가 있음을 비로소 안다

 

몇 번 몰락에 발가벗은 것들은 기원(起源)을 향해 자란다

 

큰 나무는 자라서 작은 나무가 되고 작은 나무는 자라서 구름이 되고 구름은 자라서 새가 되는 마을

 

질긴 하느님, 씹었다가 뱉고 뱉었다 씹는 페이지, 유리창이 맑다

한참 가난해지고 나서야, 맑은 옥희 까르륵 웃고 있다

 

—시집『몰락경전』(2016)에서

 

 


 

김수우 시인

1959년 부산 출생.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5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길의 길』 『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 『붉은 사하라』 『젯밥과 화분』 『몰락경전』. 번역시집 『호세 마르티 시선집』 그리고 비평집 『호세 마르티 평전』, 산문집 『쿠바, 춤추는 악어』 『호세 마르티 평전』외 십여 권 상재. 부산작가상 수상, 최계락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