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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운자 시인 / 사랑의 레시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5.

정운자 시인 / 사랑의 레시피

 

 

굴소스 한 스푼 잘 저어 줘요

그대 식탁에 올려 드릴,

굵고 퍽퍽한 그것을 써는 동안

그대를 발목 잡던 빨판

흔들리는 불신의 대가리

내가 당신께 줄 건 붉음밖에 없어요

양파껍질로 훌훌 벗겨 낸

눈물이 자작자작 졸아들어

먹물주머니까지 말랑해질 때까지

불을 끄고 눈을 감아요

비리지 않게,

뿌리도 버려요

시커멓게 우려낸

식은 눈웃음도 지우고

심장을 찬물에 담가요

오징어 긴 다리로 건너오는 당신

 

 


 

 

정운자 시인 / 공지

 

 

안동, 춘양, 태백에서 올라온

중백의 할머니 네댓 희희낙락 거린다

동창이라고 오십여 년 만에 모인 자리

멀어도 멀지 않은 추억만큼

먼 친척보다 환하게 만난 경옥이 형옥이 옥남이

깊어진 주름 업고 온 길

 

누구는 며느리 덕으로 호강하고

또 누구누구는 사위 잘 얻어 느지막이 팔자 고쳤다는 소문도

줄줄이 꺼내놓은 손자 자랑만 못했다

먼저 가 기다리는 서방 만날 때는 새 옷 입고 가고 싶다며

일찍 혼자된 경옥이 사정에 눈 붉어지고

자식도 안 해주는 수의를 준비해야겠다는 말에

예나 지금이나 눈치 없는 옥남이는 윤년에 하라며 맞장구쳤다

명이 이만큼 길었으니 얼굴 본다며 웃어보지만

뭔 놈의 동창이냐고 역정 내던 영감 말이 생각나고

여태 취업 못한 아들도 떠올랐다

 

어떤 기억은 오래될수록 더 선명해져 밤새 불 밝힌다

헤어지며 기약 없는 다음을 약속했다

하나둘 왔다가 하나둘 돌아오지 못하고 점점 헐렁해진 모임

문자가 또 왔다.

 

- <다층 2017년 겨울호

 

 


 

정운자(鄭雲慈) 시인

2013년  계간 <다층> 봄호 2회 추천 완료. 현재 다층, 다층문학회 동인, 양주작가회의 회원, 한국작가회의 양주지부 회원. 수채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