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자 시인 / 사랑의 레시피
굴소스 한 스푼 잘 저어 줘요 그대 식탁에 올려 드릴, 굵고 퍽퍽한 그것을 써는 동안 그대를 발목 잡던 빨판 흔들리는 불신의 대가리 내가 당신께 줄 건 붉음밖에 없어요 양파껍질로 훌훌 벗겨 낸 눈물이 자작자작 졸아들어 먹물주머니까지 말랑해질 때까지 불을 끄고 눈을 감아요 비리지 않게, 뿌리도 버려요 시커멓게 우려낸 식은 눈웃음도 지우고 심장을 찬물에 담가요 오징어 긴 다리로 건너오는 당신
정운자 시인 / 공지
안동, 춘양, 태백에서 올라온 중백의 할머니 네댓 희희낙락 거린다 동창이라고 오십여 년 만에 모인 자리 멀어도 멀지 않은 추억만큼 먼 친척보다 환하게 만난 경옥이 형옥이 옥남이 깊어진 주름 업고 온 길
누구는 며느리 덕으로 호강하고 또 누구누구는 사위 잘 얻어 느지막이 팔자 고쳤다는 소문도 줄줄이 꺼내놓은 손자 자랑만 못했다 먼저 가 기다리는 서방 만날 때는 새 옷 입고 가고 싶다며 일찍 혼자된 경옥이 사정에 눈 붉어지고 자식도 안 해주는 수의를 준비해야겠다는 말에 예나 지금이나 눈치 없는 옥남이는 윤년에 하라며 맞장구쳤다 명이 이만큼 길었으니 얼굴 본다며 웃어보지만 뭔 놈의 동창이냐고 역정 내던 영감 말이 생각나고 여태 취업 못한 아들도 떠올랐다
어떤 기억은 오래될수록 더 선명해져 밤새 불 밝힌다 헤어지며 기약 없는 다음을 약속했다 하나둘 왔다가 하나둘 돌아오지 못하고 점점 헐렁해진 모임 문자가 또 왔다.
- <다층 201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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