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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승희 시인 / 모란의 시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20.

김승희 시인 / 모란의 시간

 

 

무슨 시간

어느 시간

모란이 핀 시간

무슨 시간

어느 시간

세상 모두 숨 죽여

너도 없고 나도 없고

멀리 모란의 숨결이 불어오는 시간

무슨 시간

어느 시간

한밤중에 홀로

경련으로 몸이 출렁이는 시간

무슨 시간

어느 시간

뭐 이런 시간

뭐 이런 절벽

뭐 이런 벼락

죽을 수도 있는 시간

죽어가는 어떤 시간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숨을 죽이고

꿈틀거리는 심장 홀로

모란만 남는 그런 시간

모르는 숨결이 슬쩍 칼처럼 지나가는 시간

모르는 숨결이 슬쩍 칼처럼 들어오는 시간

무슨 시간

그런 시간

모란이 핀 시간

무슨 시간

그런 시간

망할 놈의

모란이 뚜욱 떨어지는 시간

 

계간 『열린시학』 2021년 가을호 발표

 

 


 

 

김승희 시인 / 나를 부수는 나에게

 

 

미안하게도 사람이 되기 위하여

사람을 부수는 사람

무엇이 되기 위하여 자기를 부수는 나

이렇게 말하면서 무엇을 말하는 자

 

미안하게도 사람이 벽으로 보일 때

사람이 빵으로 보일 때

사람이 돈으로 보일 때

사람이 팽이로 보일 때

사람이 바위로 보일 때

사람이 개미로 보일 때

사람이 석류 두개골로 보일 때

이 모두가 결국 하나이고

잠시의 영원

 

이 모든 것을 품고 넘어야 사람은 사람이 되나

사람을 넘는 사람

미안하게도 사랑을 부수어야 사랑이 되나

뜨거운 매미 울음 끓어 넘치는 이 더운 미친 여름에

무엇이 되기 위하여 자기를 부수는 나

이렇게 말하면서 무엇을 말하는 자

 

월간 『현대시』 2019년 9월호 발표

 

 


 

김승희 시인

1952년 전남 광주에서 출생. 서강대학교 영문학과와 同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이상 시 연구>로 국문과 박사학위를 받음. 1973년 《경향신문》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에도 당선. 시집으로 『태양 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달걀 속의 생』,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등이 있고, 그밖의 저서로는  산문집 『33세의 팡세』, 『남자들은 모른다』,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등과  소설로는『산타페로 가는 사람』, 『왼쪽 날개가 약간 무거운 새』 등이 있음.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