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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자규 시인 / 낙엽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20.

이자규 시인 / 낙엽

 

 

아름다운 최후를 위해 살았다

푸른 의지로 열렬히 나부꼈다

단풍으로 뜨거웠던 노후가 생의 절정이라서

흙에 들어야할 노래가 흙의 색깔로 천천히

바람이 분다

나무의 사지가 비틀릴수록 그의 내생은 깊어서

가느다란 잎맥이 마지막 입맞춤을 불렸다

가끔 폭설과 함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도 새겨졌다

 

미명을 사르던 가지 끝

지난 해 보낸 제 분신들을 알고 있는

인지의 나무

 

땅에 닿는 순간까지 푸르렀던 의미

모든 것은 기억의 뼈대로 키가 큰다

낙엽의 주검은

불굴의 그늘이 될 귀환이므로

겨울새 하나 둘 가지에 열리기 시작 했다

 

 


 

 

이자규 시인 / 유리벽 에세이

 

 

내가 강을 말하면 그는 산을 말했다

그가 창문을 열면 나는 긴 팔 옷을 걸쳤다

침묵과 침묵은 서로 꼬리 흔들다

소원해졌을 때 그가 색소폰을 불고 나면

나는 유행가를 들었다

무인도와 협곡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

그는 나 내가 그여서 한 접시의

푸성귀와 생갈치에 뿌리는 양념소금처럼

등 돌리며 다시 스쳤다

폰에 저장된 그의 관악기 부는 서양음악

두 귀를 막다가 폰 휴지통으로 보낸 후 폭풍 아우성치는 한 여운을 읽고 있다 | 끼니 없는 추억을 들으며 내가

냄비 소리 냈을 때 그는 이부자리를 깔았다

유리벽의 안과 밖은 서로를 견디고

견뎌낸 온도 차이일 뿐 아무 일도 아닌 듯

그가 웃었을 때 나는 눈물이 났다

못 위에 있는 새를 보며 그는 오고 있다 하고

나는 가고 있다 했다

 

- 서정과 현실』 (2019, 상반기호)

 

 


 

 

이자규 시인 / 빈 구두와 날짜들

 

 

시간을 분리하다 발판을 분리하다 그림자도 따라 갔다

움푹 들어간 날짜가 제거되고 신경선을 걷었다

비는 내리고

스쳤던 등받이에 닳아빠진 낱말들

흰 유니폼들이 인공 웃음으로 지나가고

비바람은 사선이다

금속성 데이트를 등으로 새겨야 했기에

바퀴를 뜯어내는 기억을 붉은 녹이 말했다

 

날것들이 눈꺼풀에 날아들었다

빈 구두와 빈 모자 그리고

미소가 필수인 종양실과 바흐가 흐르는 채혈실

붉은 장미가 각혈을 부풀렸다

방천 둑 쇠비름 따위나 되어 꽉꽉 밟히고 싶은

불면 한쪽을 난도질로 쥐어뜯는다면

단풍잎 울음은 어느 휠체어에 앉히나

하늘이 낮아졌다 '당신이 밀고 내가 앉고 싶어' 내 말에

'여기까지 내 그릇인가 봐'

우북이 쌓인 말들만 난무했다

 

*시집 / 아득한 바다. 한때

 

 


 

이자규 시인

경남 하동에서 출생. 2001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으로 『우물치는여자』,  『돌과나비』가 있음. 현재 대구시인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