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남 시인 / 판도라
땅거미가 내려앉는 아파트 커튼 사이로 체면도 잊은 채 흘러나온 불빛을 훔쳐보며 엉큼한 유희를 즐기는 그대여 판도라를 욕하지 마라
금지된 것을 향하여 그대의 호기심은 욕망의 불꽃이 되고 꿀단지에 붙어 단맛에 취해버린 개미처럼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야 하는가
황혼이 다가올수록 새롭고 흥미로운 것도 서녘으로 지는데 그대는 심해로 머무르고 있는 휴식일 뿐이오 어린아이의 둥그러진 눈동자와 늙은 늑대의 탐욕스런 눈빛 영원한 제우스의 프로메테우스를 향한 음모의 시작이며 에피데우스의 사랑도 판도라의 호기심을 붙잡을 수 없다는 말인가
희망은 컴컴한 어둠에 갇히고 거리의 여인을 향한 음탕한 발걸음 그대여 판도라를 욕하지 마라
이승남 시인 / 축령산의 봄
축령산 기슭을 오르면 빼곡히 늘어선 편백나무 푸르고 짙은 향기가 온 산에 겹겹이 짙다
싱글싱글 부는 봄바람 속에 산 매화나무 수줍은 듯 벙글고 숲속 정원에 포개지는 그늘이 좋다
길가에 민들레 한 백년으로 피어나고 쑥이 자라는 양지쪽엔 은어 떼처럼 바람이 분다
그늘 안으로 햇살이 달려들고 호숫가 물오리 떼 짝짓기에 골몰하는데 텅 빈 허공 속으로 토요일의 붉은 노을이 장건한 군인처럼 불끈하다
곧 밤이 오겠지만, 어쩌면 오늘 밤 별들은 더디 돋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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