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와 한국 교회사 이야기 <상> “어흥” 호랑이 만나 기도로 위기 모면… 신앙 지키려 호환 당한 척 가톨릭평화신문 2022.01.09 발행 [1645호]
▲ 작자 미상, ‘맹호도’, 조선시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2년 새해는 임인년(壬寅年) 호랑이해다. 우리 민족에게 친숙한 동물인 호랑이는 역사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자주 등장했다. 민가는 물론 궁궐에까지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물어가는 포악한 맹수이기도 했고, 사악한 잡귀를 쫓는 영물이자 산의 왕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한국 천주교회사 속 호랑이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각 기록에 나온 호랑이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
서양 선교사들, 호랑이에 대한 기록을 남기다
호랑이에 관한 교회사 기록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처음 들어온 1830년대에 등장한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성 모방 신부가 조선 입국 후 파리외방전교회에 처음으로 보낸 1836년 4월 4일 자 편지다. 모방 신부는 편지에서 “중국인 유방제(여항덕 파치피코) 신부에게 들었다”며 아이를 잡아먹으려다 관둔 호랑이의 일화를 전했다.
“호랑이는 아이에게 덤벼들어서 겁을 주다가 잡아먹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아직 받지 않았어도) 천주교를 이미 알고 신봉하던 아이가 힘을 다해서 “예수 마리아,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 마리아, 저를 도와주소서”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호랑이는 움직일 때마다 아이와 놀려고 하기만 하였고 아이에게 어떤 상처도 입히지 않았습니다.”
이후 어른들에게 구조된 아이는 세례를 받았고, 나흘 뒤에 사망했다. 모방 신부는 이를 두고 “천주께서는 그 아이에게 천주교 신자의 인호를 받을 기회를 주셨다”고 말했다.
▲ 한국천주교회사 1874년본 표지.
조선인과 호랑이들의 살벌한 생존경쟁
한편, 제2대 조선대목구장 성 앵베르 주교가 전하는 호랑이 이야기는 사뭇 결이 다르다. 앵베르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1838년 11월 24일 자 편지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불운한 이 지역(조선)의 산에는 맹수들, 특히 호랑이가 넘쳐납니다. 해마다 적어도 1000명의 희생자가 그 이빨에 물려 죽습니다. 인구도 적고 좋은 무기도 가지지 못한 조선인들은 따뜻한 계절에는 끔찍한 동물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힘듭니다.”
19세기 당시는 산을 개간해 농경지를 넓히려는 인간과 줄어드는 서식지를 지키려는 호랑이의 충돌이 끝나지 않은 때였다. 호환이 빈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앵베르 주교는 “겨울에는 인간과 호랑이의 입장이 뒤바뀐다”며 다른 기록에선 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호랑이 사냥법도 소개했다.
“눈이 절반쯤 얼었을 때 (발바닥이 넓은) 사람은 눈을 밟고 다닐 수 있으나, (발바닥이 넓지 않은) 호랑이는 눈 속에 배까지 깊이 파묻혀 헤어나지 못합니다. 조선 청년들은 (꼼짝 못 하는) 호랑이에게 덤벼들어 창이나 단도로 찌르는 것을 오락으로 즐깁니다.”
이 사냥법에 관한 설명은 「한국천주교회사」에도 수록됐다. 달레 신부가 1874년 쓴 ‘최초의 한국 천주교회 통사’로 불리는 책이다. 교회사와 더불어 조선의 지리ㆍ역사 등을 다뤘는데, 지붕을 뚫고 사람을 물어가는 호랑이에 대한 기록도 있다.
“호랑이가 집집이 문단속이 잘 되어 있는 동네에 들어오면, 며칠 밤이고 계속하여 어떤 오막살이를 빙빙 돌다가 너무 허기가 지면, 마침내 초가지붕에 뛰어올라 거기에 구멍을 뚫고 안으로 들어간다.”
호랑이로부터 아내를 구해낸 김대권
「한국천주교회사」에는 호랑이뿐 아니라 호환을 ‘당할 뻔’한 순교자 이야기도 나온다. 앵베르 주교ㆍ모방 신부와 함께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복자 김대권(베드로)이다. 충남 공주에서 옹기점을 하던 김대권은 아내와 평소 싸움이 그칠 새가 없을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 크게 다툰 어느 날, 김대권은 안방에서, 아내는 부엌에서 잠을 청했다. 김대권이 잠이 막 들었을 때,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벌떡 일어났다. 호랑이가 아내를 물고 달아나던 참이었다. 김대권은 소리를 지르며 호랑이를 쫓아가 아내를 구해냈다. 이튿날 그는 하느님께 감사를 올리고 아내에게 당부했다. “이번 일은 우리 불화 때문에 생긴 것이니 우리 잘못을 고쳐 착한 일을 하며 죽을 때까지 화목하게 살아가야겠소.”
이후 열심한 신자가 된 김대권은 또 한 번 호랑이와 얽히게 된다. 그는 주님 성탄 대축일마다 근처 산에 올라가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리며 밤을 새웠는데, 하루는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를 맞닥뜨렸다. 김대권이 겁내지 않고 계속 기도를 드리자 호랑이는 공격하지 않았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척한 이영희
또 다른 기해박해 순교자인 성 이영희(막달레나)는 일부러 호환을 ‘당한 척’ 했다. 「한국천주교회사」에 적힌 내용은 이렇다. 이영희는 천주교를 미워하는 외교인 아버지의 눈을 피해 어머니(허계임 막달레나)ㆍ언니(이정희 바르바라)와 함께 몰래 신앙생활을 해왔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그를 외교인과 결혼시키려 들었고, 동정을 지키기를 원했던 이영희는 서울에 있는 고모(이매임 데레사)의 집으로 도망가기로 했다. 그래서 마을을 떠날 때 자기 옷에 피를 묻히고 갈기갈기 찢어 나무 덤불 속에 흩트려 놓았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다. 딸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아버지는 3개월 뒤에 진실을 알게 됐다. 곧장 서울로 달려간 그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살아 있는 걸 보니 다른 원이 없다. 이제부터는 네가 하겠다는 걸 막을 수가 없다.” 그 덕에 이영희는 신앙을 지키고 어머니ㆍ언니ㆍ고모와 함께 성인품에 오를 수 있었다.
▲ 해실이(망덕) 고개.
김대건 신부와 호랑이 이야기
병오박해 때 순교한 한국인 첫 사제 성 김대건 신부도 호랑이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김대건 신학생은 1844년 2월 5일부터 두 달간 중국에서 두만강을 통해 조선에 입국하는 경로를 탐색했다. 그리고 보고서 ‘훈춘 기행문’을 적어 페레올 주교에게 보냈는데, 호랑이에 관한 언급도 나온다.
“좌우로 큰 나무들로 덮인 높은 산들이 우뚝 솟아 있었고, 또 거기에 호랑이ㆍ표범ㆍ곰ㆍ늑대, 그 밖의 맹수들이 살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습격하려고 모여듭니다. 이 무서운 산간벽지 가운데로 경솔하게 감히 혼자서 지나가려고 하는 사람은 정말 불행합니다! 이번 겨울에도 근 80명의 사람과 100마리 이상의 소와 말들이 이 육식동물들에게 잡아먹혔다고 합니다.”
김대건 신부는 맹수가 습격할 수 없게끔 다른 여행자들과 무장한 채 무리를 지어 움직였다. 맹수 몇 마리가 이따금 굴에서 나왔지만, 그 위세를 보고 감히 덤벼들지 못했다.
살아서 호랑이를 잘 피한 김대건 신부였지만, 정작 세상을 떠난 뒤에 호랑이를 맞닥뜨리고 말았다. 1846년 새남터에서 순교한 김 신부의 시신이 이민식(빈첸시오)에 의해 미리내로 옮겨질 때 일이다. 「용인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이민식은 새남터에서 미리내로 가는 두 번째 고개인 망덕(해실이) 고개에서 큰 호랑이를 만났다고 한다. 순간 이민식은 등골이 오싹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호랑이를 노려보며 호령했다.
“네 이놈, 아무리 짐승이기로서니 우리의 위대한 김 신부님의 시신을 모시고 가는 앞길을 막다니 썩 물러나지 못할까?”
그러자 호랑이는 슬그머니 산 중턱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이민식은 감사 기도를 올린 뒤, 발걸음을 재촉했다. 과연 호랑이가 진정 영물이라 성인을 알아보기라도 한 걸까. 상상에 맡길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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