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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춘석 시인 / 아바타화*

by 파스칼바이런 2022. 6. 9.

박춘석 시인 / 아바타화*

 

 

보호자가 필요합니다 성을 짓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제비꽃을 고집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선명해지고 싶습니다 존재의 일회성은 새가 날아간 길과 닮아 있어서

 

담을 무너뜨린 넝쿨장미가 우리 집에 있습니다 지붕을 뚫고 올라간 석류나무도 있습니다 그들의 우주가 집보다 담장보다 컸으리라 생각합니다

 

따뜻한 집이 필요하고 따뜻한 가족이 필요합니다 제비꽃이라면 제비꽃으로 사는 게 중요합니다 그것뿐입니다

 

날마다 미세하게 균열이 생기 듯 전개되는 삶으로써 나는 공간의 틀, 시간의 틀을 깨트려보려고 했습니다만 내가 자꾸 밖으로 나간다면 제비꽃은 벽돌을 허물어뜨리고 급기야 무너질 것입니다 제비꽃을 무너뜨리고 무엇이 되려고 하지 않으렵니다 제비꽃으로 부여받은 우주조차 다 횡단하지 못했으니까요

 

맴돌듯 반복하여 살아서 서사 속에서 나는 불멸하게 되었습니다 튼튼한 집에서 살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매순간 낭떠러지에 선 듯이 나는 완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긴 순간과 넓은 영원을 건넙니다 투명한 회랑을 소리가 건너며 사라집니다 투명한 회랑에 소리의 울림이 쌓입니다

 

가을이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세계를 깨트립니다 더 큰 가을을 짓기 위해

 

문이 닫혀야 집은 완성됩니다 그래야 보호자가 됩니다 그래야 안온합니다

 

겨울 잠, 그 깊고 넓은 곳, 태어나기 위한 오랜 곳

 

내 그림자 아래 떨어진 나무 그림자, 구름 그림자, 해바라기 그림자, 누군가를 고통에 빠트린 사람 그림자, 무언가를 낭비한 사람 그림자, 그림자들…… 모두 내가 살았던 곳입니다

 

*윤회에 의해 시간의 틀, 공간의 틀, 존재의 틀이 형성된다는 인도철학

 

웹진 『시인광장』 2022년 1월호 발표

 

 


 

박춘석 시인

경북 안동에서 출생. 2002년 《시안》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나는 누구십니까?』(시안, 2012)와 『나는 광장으로 모였다』(현대시학, 2016), 『장미의 은하』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