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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연필 시인 / 정녕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7.

김연필 시인 / 정녕

 

 

너의 손등을 간지럽힌다. 네가 잠든 동안. 너의 손등에 볼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은 지워지지 않는다. 너의 손에 말을 적으면 너는 조금씩 말을 시작하고. 너의 그림은 조금씩 흔들린다. 나는 흔들리는 너를 안아 본다. 흔들리는 너를 간지럽힌다. 너는 웃고. 그러다 보면 검은 돌들이 우리를 둘러싼다. 손등에 그린 그림은 돌의 그림이다. 손등에 쓴 말은 물의 말이다. 물이 너의 손등을 간지럽히고. 나는 웃는다. 웃음이 자꾸만 돌 속에서 흐르고. 나는 너의 손등에 그린 그림이다, 너의 뺨이다, 물에 적신 너의 어떤 곳이다. 어떤 곳에 어떤 그림 그린다. 너는 계속 웃는다. 나는 계속 우습다. 나는 흔들리는 것들을 본다. 돌아가는 것들을 본다. 우스운 것들에 다가간다. 너의 뺨에는 구멍이 많다. 너에게 물이 스미고. 너는 발화한다. 계속되는 발화 속에서 흔들리며 돌아가는 것을. 너의 손등이 지워지지 않도록 그리고 그린다.

 

 


 

 

김연필 시인 / 당신도 어디인지 몰랐잖아요

 

 

슬픈 상자는 슬픕니다. 뒤집혀서 슬픕니다. 뒤가 어디인지 모르는데. 오늘은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나무의 뒷면입니다. 슬픈 상자는 상자만큼 슬픕니다.

 

슬픈 나무도 있습니다. 슬픈 나무는 뒤집혀서 슬픕니다. 뒤가 어디인지 알 것도 같은데. 오늘은 나무에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나무가 나무를 올려 주지 않아서. 나무는 나무를 올려 주지 않아서.

 

나무는 슬픕니다. 나무를 올릴 수 없어서. 나무를 올리면 부러져서. 부러지고 싶은데, 부러지는 게 무서워서. 올라간 나무가 부러워서. 나무는 웁니다. 슬픈 상자처럼 웁니다. 눈물도 흘리지 않고 슬픔도 흘리지 않습니다. 슬픈 나무는 슬퍼서 슬픕니다.

 

슬픈 나무 위에 슬픈 다람쥐가 올라갑니다. 슬픔의 껍질을 둘러싸고 올라갑니다. 볼에 슬픈 종자가 잔뜩입니다. 모두 슬픈 종자라 슬픕니다. 언제까지 볼에 잔뜩 알갱이를 넣고 올라가야 할까요. 언제까지 볼에 잔뜩 슬픔을 담고 올라가야 할까요. 슬픈 다람쥐는 슬픕니다. 다람쥐라 슬픕니다. 다람쥐지만 슬픕니다.

 

나는 처음 등장합니다. 상자를 보았습니다. 뒤집어 보았습니다. 뒤가 어디인지 모르는데. 오늘은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나무의 뒷면입니다. 나무의 뒷면을 모릅니다. 나무를 뒤집고 싶습니다. 슬픈 다람쥐 한 마리를 봤습니다. 나무에서 봤습니다. 줄무늬가 슬픕니다. 꼬리가 슬픕니다. 꼬리를 꼬리꼬리 눌러 봅니다.

 

슬픈 꼬리 하나가 떨어집니다. 슬픔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데. 오늘은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나는 등장하지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나는 일인칭이 슬픕니다. 상자도 일인칭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늘은 슬픕니다. 오늘은 나무가 슬퍼서 등장하지 않습니다.

 

나는 슬픈 가지입니다. 모두 나를 익히려고 합니다. 생으로 먹으면 아플 것 같아서. 등장이 너무 아플 것 같아서. 너무 힘든 이미지지만. 슬픈 가지는 슬픕니다. 아무렇지 않아서 아무렇지 않게, 뒤가 어디인지 모르는데.

 

 


 

김연필 시인

1986년 대전에서 출생.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2년 계간 《시와 세계》를 통해 등단. 시집 <검은 문을 녹이는>, 7인 공동 시집 『좋아하는 것을 함부로 말하고 싶을 때』에 일곱 편을 실음. 유튜브 채널 ‘김줄스 Zoolskim’에 종종 출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