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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성희 시인 / 재난의 쓸모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8.

황성희 시인 / 재난의 쓸모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까봐 오래 두려웠다

 

거리에선 다들 남남처럼 인사도 없이 지나치고

 

구름으로 얼룩진 하늘에는 태양이 넘쳐나는데

 

손의 사용은 아무데서나 스스럼없이 일어나고

 

이 다음 장면에서 나는 갑자기 사라질 것 같았다

 

재빨리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아침에 들었던 비정치적 성향의 피아노 연주곡과

특정 집단에 대한 분노로 행사한 조잡한 한표와

줄지어 선 사람들이 만들어 낸 몇 종류의 분노를

 

여기가 혹시 긴급재난지원금 신청하는 줄인가요?

뒤에 섰던 사내가 묻길래 아니라고 대답해주었다

내가 아는 것을 물어봐주어서 고마웠고

그가 모르는 걸 알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순간 나는

이곳의 재난 속에 서 있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에 능숙한 사실의 생명체 같았다

 

-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1, 9월

 

 


 

 

황성희 시인 / 불감증

 

 

창문 밖 허공. 눈만 뜨면 만나는 출구, 기꺼이 뛰어내리지는 못하고. 눈등 위에 붉은 점이 혹시나 흉할까 불안한 나이를 서글퍼 하고. 짝눈 교정을 위한 쌍꺼풀 수술은 미적 성형과는 다르다며 발끈하고. 생리 혈 얼룩진 팬티를 버리면서 이 정도 낭비는 해도 된다며 울컥하고. 4층 여자에게 새로 한 파마의 이름을 묻지 않는 것은 질투보다 교양에 가깝다는 해석이나 하면서. 오늘의 연도와 오늘의 날짜와 오늘의 요일을 나란히 쓰는 일에 아무 두려움 없는. 지구 한 바퀴의 판타지와 동네 한 바퀴의 리얼리즘을 순순히 인정하는. 그러나 때로 청소기를 멈추고 우두커니 출구를 바라보는 포즈. 한 손에는 커피. 한 손에는 감명 깊게 읽은 죽음을 들고. 진정한 용기는 전쟁도 혁명도 변절도 아닌 오늘을 견디는 법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다시 마침표를 찍는 손. 털끝 하나 떨리지 않는.

 

『4를 지키려는 노력』, 황성희, 2013, 민음사

 

 


 

황성희 시인

1972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 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200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엘리스네 집』(민음사, 008), 『4를 지키려는 노력』이 있음. 현재 '21세기의 전망'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