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 시인 / 반려
당신 안에 머물수록 식탁이 낡아간다
바다가 물결무늬 가득한 멸치와 명태를 보내왔다 가라앉은 혈류를 밀고 헤엄쳤다
산맥이 새벽빛깔 고로쇠수액을 보내왔다 깜깜 말라가는 살 속을 스며들었다
오늘밤은 식탁에 몸을 대놓고서 당신과 나 사이를 오가던 그 첫날밤의 언약과,
왼손으로는 산맥을 오른손으로는 바다를 부축하고 눈 귀 닳아 없애가며 싱싱해지는 강줄기를, 흘려넣었다
『하모니카 부는 오빠』(애지시선, 2014)
문정 시인 / 마고 할아버지
나 이제 엄마의 말씀을 벗어나고 싶네, 오늘 해질 무렵에는 꼭 뒷산에 올라 붉은 석양빛 몇 바가지 마셔볼래 깡마른 사내처럼 웅크리고 있는 아파트를 내려다볼래 세월이 꼬닥꼬닥 말라붙은 느티나무 아래서 가슴 쿵덕쿵덕, 아파트가 느릿느릿 허리를 펴고 얼굴 붉어지는 것 바라볼래 새들도 쪼아낸 햇볕들을 뼛속으로 꾹꾹 밟아 넣고, 여기저기 나무줄기처럼 흘러 나간 길들 따라 자동차들이 헤드라이트 깜박이며 아파트로 돌아오는 것 바라볼래 담뱃불 쑥쑥, 빨갛게 빨아먹는 사내처럼 입 벌리는 아파트를 바라볼래 수액이 가릉거리는 느티나무 속에서 새들이 서로의 고단한 하루에 이불을 덮어주는 소리 들을래 여기저기 방들마다 서로의 체온을 비벼 채우는 소리 들을래 어둠이 내 발끝까지 차오르고, 땅의 두꺼운 입술과 하늘의 까만 입술이 붉게 달아오른 아파트를 삼키 는 것 바라볼래 아파트가 불끈 힘을 주고 일어서서 어둠을 깨뜨리고 걸어 나와 허공에 별들을 쏟아내는 것 바라볼래 내 손으로 꼭 하늘에 따끈따끈한 별들 꾹꾹 눌러 달아놓을래
문정 시인 / 은행나무 골목
그녀와 키스하던 골목길, 그 길의 발목이 잘려나가는 통에 나는 뒤뚱거리고 있어요 골목 끝에는 데칸고원처럼 붉은 노을을 등에 업은 은행나무가 그녀의 미용실을 매달고 있고요. 그녀는 가위를 째깍거려 은행나무 가지에 연록의 꽃들을 열심히 달아 올렸죠, 나는 그때마다 데칸고원의 파릇파릇한 방울토마토를 생각했어요 총알처럼 박히는 햇볕과 바람을 잘라먹는 방울토마토, 그녀의 입술과 눈동자가 미용실에서 볼록볼록 붉어지고, 나는 할아버지의 등짝처럼 넓은 은행나무 등 뒤에 붙어 가릉거리는 숨소리를 들어요 할아버지는 오늘도 금방 딴 방울토마토를 지고 바오밥나무 줄기 속으로 들어가겠죠 어릴 때 나는 밤새 어둠을 조각내며 두꺼운 외투를 두른 바오밥나무에게 양쪽 귀를 걸어놓고 맨발로 종종거렸죠 할아버지가 활짝 창문을 열어젖힐 때, 나는 어린 야자수처럼 고개 젖혀 창문을 올려다봤죠 나는 겨우 할아버지 손에 들린 녹슨 전지 가위였어요 바람에 이리저리 튕겨나가 버리는 누런 열매, 나는 잘린 발목의 만부를 그녀에게 전하려다 점점 나무밑동처럼 굳어가고 있어요
문정 시인 / 메추리알
플라스틱 소쿠리에 메추리알이 몇 개 담겨 있다
껍데기 얼룩 사이에 울긋불긋 집과 정원을 그려 넣으려 나는 메추리알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송곳으로 알의 노른자와 흰자를 뽑아내려다가 나는 슬그머니 손을 거두었다 내 엉덩이에 아직도 남아 있는 몽고반점이 들썩였다
메추리는 알을 층층이 뱃속에 품고 사육장 그물막 바깥으로 지나가던 먹장구름과 짓궂은 저녁 눈보라의 빛깔과 꽃가루 날리는 허공의 향기를 잊지 않으려고 꼭꼭 다짐하듯 둥근 알의 표면에 얼룩을 그려 넣었을까?
내 엉덩이의 몽고반점 속에서 벌판을 또각또각 두드려나가는 말발굽소리가 울려나온다 벌판의 풀들이 이파리를 죽 펼쳐 파닥이고 나는 벌판 끝을 풀씨처럼 뚫고 나가 바깥 바람을 탄 것 같았는데 내 손이 다시 플라스틱 소쿠리에 들어가 있다 그래서 메추리알이 허공으로 튕겨 나갔을까? 알록달록한 달이 땅에다가 벌판을 죽죽 그려나가고 있다
문정 시인 / 도미, 아줌마
손님들이 도미회를 주문하면 나는 도미, 아줌마가 된다 눈송이들이 유리창으로 멸치 떼처럼 헤엄쳐 들어오는 저녁 쟁반 위에 몸통을 잃은 도미가 파닥인다 나는 탁자에 푸른 바다를 살짝 내려놓으면서 문득, 야간 대리운전하던 남편을 생각한다 싸락눈처럼 반짝이는 불빛 향해 손을 파닥이다가 주먹만 해지는 불빛에 부딪쳐 자동차 유리창처럼 눈알이 조각조각 깨져버린 남편, 그도 한 마리 도미였을까? 차갑게 뒤집히는 물속에서였다 도미는 멸치를 잡아 물고 멸치보다 작은 새끼를 품고 있는 아내에게 돌아오곤 하였다 붉게 상기된 비늘과 지느러미로 사랑을 쓸어 넣고 문단속 잘하라 당부하며 바다로 달려나간 도미, 나는 숨을 깔딱거리는 도미의 아가미에 숨길을 대고 도미는 복숭아꽃잎 같은 살을 저며 펼치고 있다 파도를 오래 새겨 넣은 상춧잎 같은 지폐 한 장이 탁자 위에 밀려와 있다. 눈송이들이 내 눈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있다
문정 시인 / 나비의 꿈
삼겹살집 앞에 장애인용 전동 휠체어가 시동을 접습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눈으로 구워내는 우둘투둘한 연기 안구건조증까지 있는 그녀와 그가 안으로 팔과 다리와 얼굴을 이리저리 비틀고 흔들며 비집고 들어가 한가운데 자리에 앉습니다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는 냄새에 불을 붙이고 그녀가 셀프서비스 길 따라 뒤뚱뒤뚱 푸른 상추를 따옵니다 그가 삼겹살처럼 오그라들며 삼겹살을 굽습니다 옆 테이블 사람들이 눈을 흘깃흘깃 그녀가 상추를 펴 고기 한 점 올려놓고 그 위에 마늘 한 쪽 고추 한 조각 집어 올려 그에게 건네다가 두 눈에서 눈물이 와르르 맛있게 모아놓은 기름지고 풋풋한 초점이 와장창 깨져버립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상추의 겉잎처럼 다닥다닥 그가 비틀비틀 십 리도 넘는 비포장길을 눈물을 닦으며 걸어가 상추의 속잎처럼 두 손을 파닥파닥 그녀의 눈물을 닦아 냅니다 그들이 다시 고기를 한 쌈씩 싸들고 외줄을 타고 만나 아슬아슬한 건배 과속 방지턱을 떼어내듯 사람들의 시선을 뚝뚝 떼어내고 전등불빛 뽀얗고 포근한 안에서, 붉은 나비 두 마리 훨훨 날아다닙니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소진 시인 / 사루비아 터널 외 1편 (0) | 2022.07.25 |
---|---|
손미 시인 / 누구도 열 수 없는 병 속에서 외 4편 (0) | 2022.07.24 |
박숙이 시인 / 무 외 1편 (0) | 2022.07.24 |
주영중 시인 / 이중의 사슬 외 1편 (0) | 2022.07.24 |
김나원 시인 / 뒷북 외 1편 (0) | 2022.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