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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숙이 시인 / 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24.

박숙이 시인 / 무

 

 

보디빌더의 딴딴한 근육 같은 무를 사 안고 집에 왔다

​군대 간 아들이 와 있는 것처럼 집이 그득하다

​씻어도 씻어도 가을바람을 함께 마신 흙이

​어미를 따라온 혈육처럼 무에서 쉽게 떨어지질 않는다

​따스해서 정들었던 시간보다 추워서 맞댄 시간들이 저 무살에 박혔으리라고

​흙을 씻으며 생각을 두 동강 뚝 잘랐는데, 아따, 무가 억시기 달다

​싱싱한 무가 단물을 질질 흘린다 흙이 얼마나 애지중지 달게 품었으면

​무가 이리도 훤할까

​몇몇 시인과 함께 뜻이 있어 찾아가 만났던,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한

​소년분류심사원의 소년들도, 흙처럼 따뜻이 품어 안으면 정말 하얀 無가 될까.

​무가 무럭무럭 잘 자라려면 팽팽하게 고른 땅이라야만 뿌리를 잘 내린다는데

​뿌리 제대로 내리지 못한 그 무들은 이 황금빛 가을을 어디서 만나니,

​만날 수가 없어 어떡하니,

​시퍼런 무청을 지닌 신념 확고한 청년 같은 저 무들을

​엄동설한, 하나하나 마음으로 싸서 얼지 않도록

​바람 숭숭 들지 않도록, 겹겹의 체온으로 감싸고 또 감싸고는 있지만

​다 자라도 이 애물단지들

 

 


 

 

박숙이 시인 / 三合

 

 

소가 주인을 어무이 어무이 따르는 것은

주인이 논바닥에 함께 발 딛고 있기 때문이다

땀흘리며 논바닥에서 함께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데서 부리지 않고 함께 호흡을 맞추기 때문이다

고된 노동 속에서도 서로의 눈빛이 그렁그렁한 것은

心田에서 희로애락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무지렁이에서 똥-누는 모습까지 다 보여 줬기 때문이다

땅과 서로 우직함을 오래 되새김질을 했기 때문이다

우둔하게 서로 주인으로 섬기는

고지식한 땅, 고지식한 소, 고지식한 농부,

과묵한 근성이 깊이 발효된

아, 참 지독한 삼합이네 그려

 

 


 

박숙이(朴淑伊) 시인

경북 의성에서 출생. 1998년《매일신문》신춘문예 동시 당선. 1999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으로『활짝』『하마터면 익을 뻔했네』등이 있음. 2019년<서정주 문학상> 수상. 청구문학대상, 신라문학대상,  2009 대구문학상. 현재 대구문인협회회원,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