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이 시인 / 무
보디빌더의 딴딴한 근육 같은 무를 사 안고 집에 왔다 군대 간 아들이 와 있는 것처럼 집이 그득하다 씻어도 씻어도 가을바람을 함께 마신 흙이 어미를 따라온 혈육처럼 무에서 쉽게 떨어지질 않는다 따스해서 정들었던 시간보다 추워서 맞댄 시간들이 저 무살에 박혔으리라고 흙을 씻으며 생각을 두 동강 뚝 잘랐는데, 아따, 무가 억시기 달다 싱싱한 무가 단물을 질질 흘린다 흙이 얼마나 애지중지 달게 품었으면 무가 이리도 훤할까 몇몇 시인과 함께 뜻이 있어 찾아가 만났던,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한 소년분류심사원의 소년들도, 흙처럼 따뜻이 품어 안으면 정말 하얀 無가 될까. 무가 무럭무럭 잘 자라려면 팽팽하게 고른 땅이라야만 뿌리를 잘 내린다는데 뿌리 제대로 내리지 못한 그 무들은 이 황금빛 가을을 어디서 만나니, 만날 수가 없어 어떡하니, 시퍼런 무청을 지닌 신념 확고한 청년 같은 저 무들을 엄동설한, 하나하나 마음으로 싸서 얼지 않도록 바람 숭숭 들지 않도록, 겹겹의 체온으로 감싸고 또 감싸고는 있지만 다 자라도 이 애물단지들
박숙이 시인 / 三合
소가 주인을 어무이 어무이 따르는 것은 주인이 논바닥에 함께 발 딛고 있기 때문이다 땀흘리며 논바닥에서 함께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데서 부리지 않고 함께 호흡을 맞추기 때문이다 고된 노동 속에서도 서로의 눈빛이 그렁그렁한 것은 心田에서 희로애락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무지렁이에서 똥-누는 모습까지 다 보여 줬기 때문이다 땅과 서로 우직함을 오래 되새김질을 했기 때문이다 우둔하게 서로 주인으로 섬기는 고지식한 땅, 고지식한 소, 고지식한 농부, 과묵한 근성이 깊이 발효된 아, 참 지독한 삼합이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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