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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계영 시인 / 출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7.

유계영 시인 / 출구

 

 

마음에 드는 색을 고르고 그린 이마의 빛

때로는 태어나기 위해 스스로 불태웠다

 

겨울곤충은 우리들 손바닥 위에서

몸을 네 번 접고 죽어버렸다

 

투명한 눈꺼풀을 가지고 있어

자라지 않는 나의 잠

 

발소리를 죽이며 걷는 법을 배우고

죄 짓는 방법까지 알게 되었다

내일은 내일 오겠지

쫓아오는 것이 있다고 믿으며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더 많은 비를 맞을 것이다

우산의 얼굴이 바라보는 것은 모두 우산이라는 것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다만 우리가 할 일

 

 


 

 

유계영 시인 / 헤어지는 기분

 

 

뚜껑 달린 컵처럼 때로는 선택 받았다는 느낌

물건을 살 때마다 흰 것을 골랐다

36색 크레파스 중 끝까지 닳지 않던 색

꿈속에서 사람들이 분분히 펼쳤던 손바닥

모두 나와 악수하고 나를 지나쳐간다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왜 자꾸 따라오지 나는 지웠어

깨어나고 나서야 슬픈 꿈이었다

빛나는 구석이 없었다

나일론 끈으로 동여맨 상자가 버려져있다

이것은 무엇을 본 딴 모양일까

버리면서 가벼워지면서

더 무거운 것을 받아들일 준비

유리가 나를 경멸할 때 지어보였던 표정을

혼자 남아 연습했다

빛나는 구석이 없었다

여행지에서는 커튼을 치지 않고 잤다

아무도 나에게 잘못하지 않았으니까

불쑥 들어온 햇살이 흰 것을 들고 나간다

원래 내 것이니까 다시 가져간다

해년마다 겨울 기후가 반복되었고

겨을 안에 시간이 멈춰있다고 믿었으며

겨울의 일들이 잊혀지지 않았다

목격자가 없는 꿈들은

쉽게 없던 일이 되었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영혼들이

개로 태어나 짧게 삶을 반복하고 갔다

빛나는 구석이 없었다

 

 


 

 

유계영 시인 / 시작은 코스모스

 

 

낮보다 밤에 빚어진 몸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병이 비치는 피부를 타고났다

 

모자 장수와 신발 장수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끔은 갈비뼈가 묘연해졌다

죽더라도 죽지 마라

발끝에서 솟구쳐

 

사랑은 온몸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는 나의 바지다

나도 죽어서 신이 될 거야

그러나 버릇처럼 나는 살아났다

 

검은 채소밭에 매달리면

목과 너무나도 멀어진 얼굴

두 마리의 물고기가 그려진 국기처럼 서로 마주 봤다

 

멀리서부터

몸이 다시 시작되었다

젖은 얼굴이 목 위로

곤두박질쳤다

 

 


 

유계영 시인

1985년 인천에서 출생. 동국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온갖 것들의 낮』(민음사, 2015)과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현대문학, 2018)와 『이런얘기는좀어지러운가』(문학동네, 2019)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