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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은숙 시인 / 틈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7.

송은숙 시인 / 틈

 

 

 ‘틈’이란 말에는 ㅌ과 ㅁ을 가르는 ㅡ가 있다 나는 그것을 시라 부르겠다 그러니까 시는 장롱에 들어가 눕는 일이다 ㅡ는 이불과 베개 사이에 자리 잡은 어린 ‘나’이다 앨리스는 나무 틈새로 미끄러져 들어가 모자 장수를 만나고 나는 이불 사이에서 무수한 이불 같은 구름을 만들어 구름 나라 아이들과 논다 구름은 가볍고 따뜻하고 졸리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장롱 속에 웅크린 어둠이 등을 쓸고 지나가던 그 공포의 순간이 시였을까 그러니까 시는 틈새에 손을 집어넣는 것이다 그 손에 무엇이 닿을지 서늘한 어둠의 입자를 집요하게 살펴보는 일이다 바위틈에 자리한 새 둥지에 손을 넣어 알을 꺼낸 적이 있다 이불 틈에 넣어 둔 알의 두근거림과 내 심장의 두근거림이 마구 공명하던 어느 날이다 알은 날개를 갖지 못하고 내 심장은 죄책감으로 빨개졌다 그때 쏟아 낸 울음이 시였을까 문틈으로 눈을 대고 밖을 바라보는 일 다시 밖으로 나가 눈을 대고 안을 바라보는 일 밝음과 어둠은 함께할 수 없다 밝음 쪽에서 어둠과 어둠 쪽에서 밝음을 서로 바라볼 뿐 눈이 시려 왔던 그 밝음과 어둠의 한나절이 시였을까 베란다에 서서 초승달을 본다 초승달은 어둠과 어둠 사이의 ㅡ이다 사실 저 초승달은 하늘 뒤편에서 이편을 엿보는 거다 어둠 속에서는 초승달과 하늘이 전도된다 앨리스는 초승달을 타고 올라간다 손을 들어 달을 잡아 본다 거기 시가 있다

 

 


 

 

송은숙 시인 / 허공의 집

 

 

절벽에 매달린 집이 있네

집이, 그러니까 ㅈ ㅣ ㅂ이 지붕과 기둥과 방으로 이루어진 거라면

바다갈매기 둥지 같은 공중의 집도 집일까

생각하다가 아득히 추락하던 몸이 걸려 있네

허공을 밟고 오르는 저녁과

구름을 밟고 내려오는 아침 사이

바람은 요람을 흔드는 손처럼 불고

요람은 세게, 더 세게 흔들려서

소름 돋은 살갗이 여행 가방에 담긴 짐처럼 굴러다니네

지중해를 건너던 배가 가라앉자

난바다를 가로질러 일평생 따라온 관이 솟아올랐네

필리핀의 사가다엔 사람이 죽으면 절벽에 관을 매단다지

거기 의자도 하나 놓는다지

육탈된 혼이 의자에 앉아 편히 쉬라고

흔들리던 말들은 공중에 머물다 천천히 가라앉지

새 등을 타고 날아가기도 하지

수장된 혼을 봉인하여 걸어 놓고

가만히 그 곁에 드러눕는 밤

사가다의 절벽처럼 의자를 들여야겠다고 생각하네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과 나란히 앉아

잔도(棧道)를 물들이며 장엄하게 지는 해를

바다의 끝에서 향나무가 자라는 것을

누군가 밧줄도 신발도 없이

제 관을 등에 짊어지고 오르는 것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아야겠다고

 

*허공의 집: 스웨덴에서는 최근 난민 등으로 인구가 급증하자 절벽에 ‘둥지집’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송은숙 시인

대전에서 출생. 충남대학교 사학과 졸업. 울산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수료. 2004년 《시사사》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돌 속의 물고기』, 『얼음의 역사』 가 있음. 현재 〈화요문학〉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