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용 시인 / 제자들에게
발걸음 굽어보며 생활을 곱씹다가 하늘 올려다보니 어느덧 나이 마흔이 보이는구나 내 곱고 착하고 이쁜 제자들아 배우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무거운 어깨의 제자들아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과목이 무엇인지 아느냐 입시준비에 여념이 없는 아이들아 국어 수학 영어더냐 사회 국사 과학이더냐 이것들은 너희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쉽게 잊혀질 것이다 잊혀질 수 없고 잊어서도 만되는 과목이 있다 바로 '가정'과 '도덕'이란다 마흔을 앞둔 가난한 시인 선생이 간절히 바라노니 제자들아, '엄마' '아빠'보다 더 높이 받들어야 할 이름이 무엇인지 아느냐 바로 '아버지' '어머니'란다 훗날, 지금은 너희들의 단단한 뼈마디를 접게 하는 이름 '아비' '어미'란다 나는 그대들이 손수 따뜻한 국 한 그릇에 꼬들꼬들한 밥 한 술 지어 올릴 줄 아는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 눈 내리깔고 공손히 허리 굽힐 줄 아는 제자 한 해에 한 번이라도 두 분께 큰절 올릴 줄 아는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 너희 어미는 서서히 설겆이, 빨래, 집안청소, 매 끼니마다 밥하시고, 그대들 뒤치닥거리에 허리가 차가운 반달처럼 굽어질 것이다 때로는 연필을, 책을 쥔 그 손으로 어미의 굽은 허리를 주물러 펴 드리는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 생활의 무게에 눌려 가벼워진 아비의 어깨에 살며시 뒤로 가 두 손 얹고 숨죽이며 아비의 흰 머리카락을 보며 흐느낄 수 있는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 아비 어미의 거칠어지고 터진 손을 고사리 같은 너희 두 손으로 꼬옥 감싸 쥘 수 있는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 높게 바라보며 가슴에 묻어두어야 할 우리 부모님 학교가기 위해 집을 나설 때 부모님과 헤어질 때 앞만 보고 달려가지 말고 잠시 뒤를 돌아 보거라 다시 돌아 보거라 어서 들어가시라고 하거라 그래도 끝내 이쁜 새끼들 만 보일때까지 지켜보시던 눈빛 그 애처롭고 아련한 눈빛을 보석처럼 가슴에 담을 줄 아는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 내 사랑하는 제자들아, 지금은 말이다 너희들이 부모님 가슴을 허물지만 언젠가 우리네 아비 어미로 하여금 너희의 가슴이 무너질 것이다 우리들 스스로 가슴 치고 피눈물 뿌리며 무너질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눈부시고 눈시린 그분들을 위해 아름답게 무너지고 엎드릴 줄 아는 제자가 되기를 나는 원한다
김선용 시인 / 울어라, 대한민국
2004년이 흔들린다 탄핵이 뭔지 행정수도가 뭔지 관습헌법이 뭔지 4대 개혁 입법이 뭔지 몰라 등 돌리고 돌아서니 내 가난한 이웃들이여 거저 처자식 먹일 수 있는 한 술 밥과 한 그릇 따순 국에 감사하고 싶구나 감사하고 싶은데 아무 것도 없는 대한민국이여 내 휘청이는 조국이여 이웃 K씨는 너무 낮게 울어 보이지도 않는가 대구에서 상경하여 막노동판에서 일하다가 실직하여 밀린 월급까지 띠이고 아내는 학교식당 주방일 나가고 자신은 빨래 널 다 계단에서 굴러 이마가 찢어졌단다 다친 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병원비가 제일 무서워 면도칼로 너덜너덜해진 살을 찢고 생살을 바늘과 면실로 여섯 바늘을 꿰매었단다 그 위에 한 장의 파스를 붙였단다 가난이 제일 무서운 나라 병원비가 제일 무서운 나라 무료급식소에서 한 끼 밥을 타 둘로 나누어 다음 끼니를 예비하는 나라 배고픈 세상에 부대끼게 하고 싶지 않아 새끼 낳지 않는 나라 고운 지 새끼 남의 집 문 앞에 화장실에 공원에 남 몰래 버리는 나라 짐짝처럼 양로원에, 사회복지시설에 부모 맡기고 '부모 포기 각서 쓰는 나라 착한 사과박스에 굴비 박스에 시퍼런 돈 오갈 때 나라님, 높으신 분들 하늘 보며 이상향 그릴 때 곪아 터질 대로 터진 우리 이웃들 더러는 높은 곳에서 더러는 골방에서 농약 먹고 또 누구는 나무에 목매달아 꽃잎처럼 떨어진다 무궁화꽃잎처럼 사뿐히 내려 앉더라 우리는 이제 누구를 우러러 보아야 하는가 어디에 쓰러지는 생명 기대어야 하는가 울어라, 대한민국 오늘도 새 아침 곳곳에서 가슴에 손을 대고 태극기를 보며 조국과 민족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한다 어찌 이다지도 목숨이 모진가 흐느끼는 심장에, 놀라 떠는 착한 가슴에 차라리 통곡하라, 대한민국 숨죽이는 울 어미의 나라 쓰러지는 울 아비의 조국 배 고프고 추위에 우는 코흘리개 울 새끼의 땅 지천으로 시뻘겋게 단풍들며 숨 넘어가는 2004년 피 토하라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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