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자 시인 / 밤바다
이 도시에 사는 이십 년 동안 바다를 앞치마나 목도리처럼 두르고 살았다 어둠이 칼칼하게 펼쳐있는 바다에서 썰물에 드러나는 돌멩이처럼 조금은 쓸쓸해도 좋았다 손아귀에 쥔 손금 같은 뱃길을 감추고 어둠에 부표처럼 떠 있는 작은 배 낚시꾼이 건져 올린 은빛 갈치가 반짝, 허공에 빛나는 브로치처럼 끼어들곤 했다 밤에 키가 자라듯 생각을 키우는 것도 묵지 같은 바다였다 묵지를 들추면 하얀 속살이 나올 것 같았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꾸륵꾸륵 몇 번 울고 마는 도요새의 울음과 그 총총거리는 발자국 사이에 달빛이 황금빛 길을 내며 알알이 집어등을 켜든 배에 이 도시의 아버지와 오빠의 빛나는 얼굴 그들이 다스리는 식솔들의 웃음이 만선의 꿈에 있었다 난 이 바다에 자주 내 안에서 글썽거리는 낡은 것들을 내다 버렸다
파도를 등지고 앉는다 내 글썽이는 방마다 집어등 같은 불을 밝히고 밤바다로 자일을 묶고 내가 버린 것과 내일 사이의 협곡에 도요새처럼 얼굴을 묻고 잠들곤 했다
박승자 시인 / 곡두
어여쁜 과수댁 울 밑에 분꽃향이 분분한 밤이면 독 뚜껑 뒤집어 무딘 칼을 쓱쓱 갈곤 했다 달은 하얀 박속처럼 제 살을 박박 갉아 먹고 바가지 형상으로 덩그러니 어둠 속에 팽개쳐 있을 때 또아리 풀고 소리 없이 담장 밑을 기어 나가는 구렁이
촉수 낮은 알전구 밝혀두고 여름, 매운 무를 썰며 잘 벼린 칼 주위로 시퍼런 불이 모여들었다 여름밤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잘리는 소리 분꽃 모가지가 낭자하게 꺾이고 새침처럼 똑, 똑 도마 위의 칼소리 생피를 쏟아버린 그녀의 낯빛처럼 댓돌 위의 신발 속에 창백한 달빛이 기우뚱 고이고
알전구가 꺼지고 희부연 새벽에 시침 떼고 아랫목에 앉아 있는 구렁이 앞에 흰 쌀밥에 무나물을 차려놓고 수저 한 가득 밥을 퍼 먹는 그녀의 치마 속에 숨겨있는 아홉 개의 여우 꼬리를 보았다
밤새 어린 계집애가 바람벽을 마주 보고 두 눈 부릅뜨고 있었다
박승자 시인 / 어느 날, 눈 오는 밤을 펼치며
기차가 지나가면 살강 위에 엎어둔 그릇처럼 흔들리는 집 밤늦도록 재봉틀 돌리는 소리 선로를 뜨겁게 달구며 기차는 멀리 광주로 여수로 가고
아랫목과 윗목의 경계를 지우는 박음질 소리
북동풍이 창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며 눈볕이 스며든 미닫이창을 열고 무슨 긴한 일이 있는지 아님, 하얗게 지워진 풍경이 아늑하게 두 손을 붙들고 있는지 방 안 가득 바늘 쌈지 같은 북동풍이 매섭게 차오르도록 창문에 매달려 있는 여자 은빛 꽃을 피우고
창문을 닫는 여자의 어깨에 얼음눈물이 맺혀있고 종일 그녀가 어금니로 끊어 놓은 실밥처럼 눈 나비는 날아오르고 닫힌 창문 너머로 기차가 아득하게 하늘로 오르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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