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배 시인 / 바위 앞에서
얼마나 오래 말을 참았는지 마른버짐 입에 거미줄까지 두른 바위 앞에서 탕진(蕩盡)을 맛 본 사람이 멈출 때와 굴러갈 때를 꿇어앉아 다시 묻는다 바람을 읽어내던 떡갈나무 장모(丈母)는 주물을 외더니 날이 뭉개진 녹슨 칼로 머리카락 몇 개를 잘라낸다 서럽게 죽은 조상의 혼령(魂靈)이라도 더 찾아내려는지 추락하는 칼의 굿은 새벽에도 끝나지 않았다 아비의 바위에서 떼어져 굴러와 홀로 박힌 바위의 외로움에 불나방처럼 쫓아 다녔거나 여기저기 다리 들고 눈물 찔끔거리던 수캐의 거시기 대가리도 문지른다 도토리 고수도 물소리 법사(法師)도 가랑잎 무녀(巫女)도 다 지쳐가고 있음으로 옥탑방에 올라가 두문불출 시답잖은 일기 몇 줄로 혼탁세상 꿈꾼 죄도 이쯤에서는 바위에게 빈다
박윤배 시인 / 붉은 찔레꽃
내 손등의 피를 너는 맛보았으므로 내 손등도 너의 피를 맛보았으므로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돌연 변이처럼 불쑥! 배암의 붉은 혓바닥처럼 나 너로 인해 아팠던 자리 찔레꽃 붉게 피리라 수북하게 던져둔 깨어진 사발의 파편 속에 어느 시인의 애인이 묻어둔 편지 어둠 속을 걸어온 내가 먼저 달려가 달의 눈빛으로 먼저 읽는다면 너의 꽃잎을 몰래 꺼내 읽는다면 혓바닥 닿는 너의 지천은 붉은 울음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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